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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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으로 직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문화가 전파되자 고품격의 도장이 제작되었다. 송대에 이르자 도장의 족보인 인보(印譜)가 유행했다. 문인들은 자신의 글이나 예술작품에 관인을 찍었다. 서예가인 미불(米巿)이 가장 먼저 도장을 사용하자 조맹부(趙孟頫), 오구연(吾丘衍)이 뒤를 이었다. 명대의 화가 왕면(王冕)은 화유석(花乳石)으로 만든 돌도장을 유행시켰다. 명청시대에는 유파까지 생겨 본격적인 대중화시대가 열렸다. 정경은 항주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술장사로 연명했다. 그러나 꾸준한 노력을 거쳐 어느새 군서박람의 경지에 올랐다. 주변에서 과거에 응시하라고 추천했지만 완강히 거절하고 포의자락(布衣自樂)하며 살았다. 유난히 전각을 좋아했던 그는 서호 주변의 동굴, 사찰, 탑 등에 석각을 새겼다. 일정한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한 그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금석문자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다. 금석문자의 감별은 물론 시서화에 모두 능통했던 그는 진한시대의 정수에 자신의 감각과 융합하여 고대 전각예술의 전통을 보존했다.
정경은 짧은 칼로 작품을 새겼다. 칼날의 움직임에 따라서 드러나는 문자는 붓글씨의 맛이 그대로 재현되었고, 면에 남은 반점과 주물이 주는 금석감이 조화를 이루어 질박하면서도 웅혼한 품격을 지녔다. 일부러 가늘고 부드러운 선으로 유약하게 새기던 기풍을 일소하고, 독특한 질감을 지닌 전각예술의 새로운 기치를 들었던 그는 절파전각예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대부분 두 개의 칼을 사용했지만 정경은 하나의 칼로 붓굴씨를 쓰는 것처럼 새겼다. 자연스럽고 웅혼한 느낌을 주는 이 기법이 ‘단도법(單刀法)’이다. 정경이 죽은 후 황이(黃易)가 뒤를 이었다. 사람들은 이 사제지간을 ‘정황(丁黃)’이라 불렀다. 이후에 항주출신 장인(蔣仁), 해강(奚岡), 진예종(陳豫鍾), 진홍수(陳鴻壽), 조지침(趙之琛), 전송(錢松)이 정경의 기법에 나름대로의 특색을 갖추어 명성을 얻었다. 이들 항주출신을 ‘절파(浙派)’라 하며, 장경, 황이, 장인, 해강을 ‘서령사가(西泠四家)’라 한다. 절파는 명대에 하진(何震)이 창시한 ‘환파(皖派)’와 함께 중국 전각예술의 양대유파를 형성했다.
정경은 ‘무림금석록(武林金石錄)’에 서호 부근의 답사하여 수집한 절벽, 석굴, 사찰, 사당, 탑, 비각 등에 새겨진 글씨와 그림을 수록했다. 방대한 자료는 물론 섬세함에서도 전례가 없을 정도이다. 정경의 절파는 서령인사의 배경이다. 서령인사의 보인산방(寶印山房) 곁에 거대한 정경의 석각상이 있다. 이 석각상은 양주팔괴(揚州八怪) 가운데 나빙(羅聘)의 그림을 오석잠(吳石潛)이 조각한 것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여 극찬을 받는다. 서령인사는 정경이 살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한천(閑泉)의 북쪽에 고산과 통하는 소룡홍동(小龍泓洞)이라는 동굴을 뚫었다. 용홍은 정경의 자이다. 암벽에는 ‘소동파가 적벽에서 노닌 지 840년, 동굴을 파서 호수의 경치와 산의 푸름이 그 사이로 숨 쉬도록 했다. 이곳에 올라야 양 쪽의 절경을 모두 볼 수가 있으니, 전각인의 아름다운 이름을 기리고자 그의 자를 따서 소룡홍이라 한다’라는 문장을 새겨두었다. 항주의 볼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