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藝美學
Ⅰ. 序 論
조선 초는 천년이상 이어저온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왔던 불교가 유교로 바뀌는 전환기이며 유학의 정신이 政敎의 목적으로 사회의 한 부분을 차지한 시기이다. 유학을 장려하는 정책은 바로 ?四書五經?의 장려로 이어지는데 이 때문에 자연히 서예도 발전하는 기회를 맞이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고려 말은 공민왕의 깊은 학문과 높은 예술적 품위 영향인지 서예 또한 예쁘게 정돈하는 서풍이 유행하였으나, 조선 초는 이성계 같은 무관적 기질과 굳센 정신력의 필요에 의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필세 또한 힘차다고 말한다. 서예정신은 麗末의 의리를 중시하던 의의를 이어서 “心正筆正”과 “心法卽字法”이 중요한 미학의 요건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 말 이제현(1287-1367)의 조맹부(1254-1322) 서체 도입으로 송설체가 유행하여 당시의 서예가는 누구나 잘 썼으나 특히 匪懈堂 李瑢(1418-1453)에 이르러 꽃을 피우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시대의 대표 인물로는 崔恒(1409-1474)ㆍ朴彭年(1417-1456)ㆍ徐巨正(1420-1488)ㆍ成俔(1439-1504)ㆍ金馹孫(1464-1498)ㆍ蘇世讓(1486-1562)ㆍ李滉(1501-1570)ㆍ洪聖民(1536-1594)ㆍ崔岦(1539-1612)ㆍ柳成龍(1542-1607)ㆍ李瑀(1542-1609) 등 1400년대에서 1600년대에 활동한 문인 문필들이다. 이들의 詩ㆍ書ㆍ序ㆍ題ㆍ評 등에서 서평과 서예미학 부분이 돋보였기로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Ⅱ. 書 評
서평은 蕭衍(464-549) 즉 南朝 梁나라를 건립한 梁武帝의 「古今書人優劣評」을 시작으로 하여 庾肩吾(487-551)의 「書品」, 李嗣眞(?-696)의 「書後品」으로 이어진다. 이의 영향이 우리나라에도 오래전부터 詩나 序ㆍ題ㆍ記ㆍ贊 또는 評 등에서 보이기 시작한지는 오래다. 일찍이 최치원(857-951?)의 ?桂苑筆耕集?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또한 고려 李奎報(1168-1241)의 ?東國李相國集? 속의「東國諸賢書訣評論序」에서 동국의 여러 名筆을 들어 평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여러 문헌에서 서평을 찾아 중국 書藝家들의 평과 한국 서예가들의 평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중 국
중국에서의 서평은 서기 약 500년경 이미 양 무제에 의해 시작 된지 오래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서예가에 대한 평은 일찍이 신라에도 있었다. 조선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崔恒42)은 당시 서예가의 대표로 꼽히는 安平大君43)의 詩軸에 序하면서 先秦이후부터 元대까지의 서예를 아래와 같이 함축하여 평하였다.
요즘 세상에는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선진 이후에는 유독 장지․종요 같은 몇몇의 무리가 호걸이었다. 진 나라에 와서는 왕희지가 처음으로 그 묘를 지극히 하였고, 당 나라에는 우세남․안진경이 있고, 송나라에는 황정견․미불이 있고, 원나라에서는 조맹부와 선우추 등의 몇 사람을 얻는데 그치었다. 이 모든 서가들의 필세는 서로 달라서 모두 각각 그 지극함을 다하려 하였다.
今天下善書者不世出. 先秦以後. 獨數張伯英․鍾元常軰爲之傑. 至晉王逸小. 殆極其妙. 唐有虞世南顔眞卿. 宋有黃太史米南宮. 於元得松雪翁鮮于伯機數人而止. 諸家筆勢不同. 要皆各臻其極.44)
“晉尙韻, 唐尙法, 宋尙意, 元尙態”라고 한다. 이렇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점 발전한 부분이 없지 않으나 더욱 뛰어나지 못함은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그래서 서예를 평함에 항상 晉代의 왕희지를 표준으로 삼는 것이다. 더구나 위 글로 보아 중국에서도 元 이후에는 뛰어난 서예가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이 들 몇몇의 평을 각각 모아 보기로 하겠다.
1) 종요ㆍ이왕
鍾繇(151-230)는 위부인(272-349)의 스승이고 위부인은 왕희지(321- 379 혹 303-361)의 스승이다. 종요와 왕희지의 글씨가 우리나라에 알려진 시기는 海東書聖 金生(711-791)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러한 종요와 왕희지에 대한 평은 그 역사가 이미 오래 되었다. 조선 중기의 퇴계 이황은 초기의 정교이념으로 전해진 유학을 理氣 철학으로 크게 발전시킨 사람으로, 특히 ‘四端七情論’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상가 퇴계가 산음에서 왕희지가 어느 도사에게 글씨를 써주고 거위를 받아온 풍류에 감동하여 「山陰換鵝」를 지어 그의 인품을 다음과 같이 기리었다.
소쇄한 산음에서 도사를 만나
도덕경을 쓰니 천년 동안 진동하네.
글씨를 거위와 바꾸어 돌아간 풍류가 심원한데
조금이라도 어찌 빼어난 모습에 누가 되리.
蕭灑山陰對羽人. 道經揮寫動千春. 換鵝歸去風流遠. 一點何曾累逸眞.45)왕희지에 대한 평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조선중기 율곡 이이(1536-1584)의 동생인 李瑀는 어머니 사임당(1504-1551)의 영향인지 서화에 능했다. 그의 「論書法」에서 “우군의 글씨는 용이 天門을 뛰어 오르는 것 같고, 호랑이가 鳳閣에 누어있는 것 같아서, 천고에 높이 뛰어나니 자랑할 만하지 않은가. 종요의 글씨는 雲鶴이 하늘에서 노는 것 같고, 子敬(344-386)의 글씨는 흰 산비둘기가 공중을 가로지르는 것 같다”46)고 평 하였다.
2) 당태종ㆍ안진경ㆍ장욱ㆍ회소
위ㆍ진대의 서예는 운치를 숭상하였으며 중화미의 극치를 이루었다고 평한다. 당대에 와서는 운치도 중요하지만 통일된 법제가 필요한 시기였다. 이와 더불어 서예 역시 통일된 규격을 중시하게 되었다. 법제화를 중시하다보니 약간의 운치는 진대에 비해 모자라지만 唐太宗(597-649)ㆍ張旭(未詳이나658-747)ㆍ顔眞卿(709-785)ㆍ懷素(725-785) 같은 우뚝한 서예가도 배출되었다. 아래는 이들에 대한 李瑀의 평이다.
당태종의 글씨는 초하룻날 밤의 은하인 듯한 義士가 울분에 북받치어 生을 잊고 긴 창과 큰 칼을 들고 戰陣에서 횡행 하는 것 같고, 顔太師의 글씨는 珊瑚나 푸른 나무가 겉과 속이 모두 골로 차있는 것 같고, 張旭의 글씨는 하늘에서 꽃잎을 뿌리듯 변화를 예측할 수 없고, 懷素의 글씨는 여름 구름이 바다에서 솟듯 기이한 봉우리가 빼어나게 솟아오르므로 바람이 일고 신기가 방자하게 이는 것 같다.
唐太宗之書. 如河朔義士. 慷慨忘生. 長槍大劍. 戰陣橫行. 顔太師之書. 如珊瑚碧樹. 表裡皆骨. 張旭之書. 如天花散落. 變化不測. 懷素之書. 如夏雲出海. 奇峯聳秀. 因風舒卷. 神氣橫發.47)
자연의 형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므로 서예는 자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점획의 형상에서부터 결구와 장법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형상을 비유하지 않음이 없다. 또한 서평에서도 위와 같이 자연의 오묘한 형상을 연상하여 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주자
중국의 철학은 宋代에 와서 꽃을 피우게 되었는데 이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 朱子(1130-1200)이다. 주자의 학문은 동방에 들어와 조선시대의 대표학문이 되었으며 이 학문의 영향으로 걸출한 학자와 이론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에 동방 리학을 집대성하고 후학양성에 여생을 바쳤던 퇴계의 맥은 유성용으로 이어진다. 유성용은 선생인 퇴계학도 존경하였지만 스승과 같이 주자학의 이념을 따랐다. 그런 그가 회암이 쓴 “孝悌忠信禮義廉恥” 여덟 자를 수신과 존양의 법으로 삼아 아래와 같이 노래하였다.
東都大尹은 참으로 옛것을 좋아하여
考亭에 鸞鳳字 새긴 것을 구해 걸었네.
종이 한 장에 한 자씩 쓴 큰 글씨가 말(斗)만한데
封遠이 題하고 西厓 아들이 부쳤다네.
서애노인은 놀라면서도 기뻐
대낮에 올려보며 心畫을 즐기네.
안진경의 근육과 유공권의 골격에는 부족한 보배지만
글자마나 용과 호랑이가 뛰는 듯하네.
들보사이에 높게 걸어 꿇어 앉아 읽으니
墨花가 반짝반짝 온 벽을 비추네.
當年에 神禹가 솥을 만드니
철끈과 金縢48)의 무게가 千石이라네.
또 秦나라 정원에 종 다는 틀을 보는 것 같아
나란히 우뚝 솟아 웅장함을 다투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 같네.
장 하도다 來繼往業을 여니
나머지 일이야 많지만 능히 이와 같음이라.
자세히 관찰해보니 자획에 독특한 기묘함은 없지만
여덟 자 가운데 精義가 있네.
‘孝悌’는 원래 百行의 근원이요
‘忠信’은 진실로 一心의 덕이 되네.
‘禮義廉恥’는 네 벼리이니
모두 修身과 存養의 큰 법이네.
聖賢之學은 요체를 앎을 귀히 여기는데
다섯 수레에 넘치는 책을 언제 다 쓰고 읽겠는가.
내 몸을 돌아보니 이미 등에서 땀이 나고
한자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제 벌써 백발이 되었구나.
은근히 시를 지어 아이들을 경계하니
내 말은 마땅히 노력하여 허망하게 되지 않게 함이라.
東都大尹眞好古. 購刻考亭鸞鳳字. 一紙一字大如斗. 題封遠寄西厓子. 西厓老人驚且喜. 白日空齋翫心畫. 顔筋柳骨不足珍. 字字龍跳又虎躍. 楣間高掛跪讀之. 墨花煌煌光滿壁. 當年神禹鑄鼎成. 鐵索金縢重千石. 又如秦庭見鐘簴. 列峙爭雄不相屬. 壯哉開來繼往業. 餘事多能乃如此. 細觀不獨字畫妙. 八字之中有精義. 孝悌元是百行原. 忠信亶爲一心德. 禮義廉恥是四維. 總爲修身存大法. 聖賢之學貴知要. 五車漫書何用讀. 環顧吾身汗出背. 一字無成今白髮. 慇懃作詩戒兒曹. 我言非妄宜努力.49)
서평은 다른 평과 달리 인품도 같이 작용을 한다. 그래서 “書與其人ㆍ人書俱老”라는 말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것이다. 위 글에서도 회암의 글씨도 좋지만 회암의 인품과 같이한 여덟 자 모두가 精義가 있는 내용이다. “孝悌는 원래 百行의 근원이요, 忠信은 진실로 一心의 덕이 되네. 禮義廉恥는 네 벼리이니 모두 修身과 存養의 큰 법이네.”라는데 더욱 가치를 느끼게 하는 점이다.
4) 조맹부
趙孟頫(1254-1322)와 우리나라 서예와의 인연은 고려 후기부터이다. 1314년 상왕인 충선왕이 元나라의 수도 연경에 있을 때 만권당을 짓고 글을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문인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이들을 상대할 고려의 인물로 李齊賢(1287-1367)을 불러 들였던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로부터 이재현은 만권당에 출입하는 요수ㆍ염복ㆍ원명선ㆍ조맹부 등과의 잦은 접촉에서 식견을 넓히었다. 특히 조맹부에게서 서예의 식견을 넓히게 되었고 이의 글씨를 고려로 들여오게 되었던 것이다. 송설체는 곧바로 정가는 물론이고 글씨를 즐기는 모든 문인들에게 전파되어 일약 교본이 되었다. 익재는 송설의 글씨와 인품을 높이 평했음을 그의 시 「和呈趙學士」50)에서 느낄 수 있다. 다음은 蘇世讓이 “송설이 쓴 칠월편이란 글씨를 보고 그 필법을 좋아해서 시험 삼아 임서를 해보았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한탄하며” 찬사를 보낸 시이다.
松雪 趙學士의 필법이 천하에 묘하다.
큰 글자는 용이 승천하는 듯하고
작은 글자는 지극히 단아하구나.
평생 동안 사모함이 깊어
이를 얻자 잠시도 놓지 못하네.
근래에 본 七月詩는
瀟洒함이 배로 비쳐 보이는 구나.
맑게 갠 창가에서 시험 삼아 한 번 임서해보니
손은 마음 따라 쓰이지 않는구나.
오히려 앉아서 큰 한숨만 나오니
심 하구나 나의 쇠함이여.
西施를 본받을 鹽씨가 없는데
어찌 진실과 거짓이 있겠는가.
또 옷깃 여김만 못하니
종신토록 아리따운 소녀를 우러러보겠네.
松雪趙學士. 筆法妙天下. 大字猶龍騰. 小字極端雅.
平生愛慕深. 得之不暫捨. 近觀七月詩. 照眼倍瀟洒.
晴窓試一臨. 手不從心寫. 却坐發浩嘆. 甚矣吾衰也.
無鹽效西施. 奚啻有眞假. 不如且斂衽. 終身仰嬌奼.51)
조선전기의 문신인 소세양은 1514년에 賜暇讀書를 한 학자로 王子師傅를 지냈다. 그는 문인으로 이름이 높고 율시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를 잘 썼다고 한다. 이로보아 당시 송설체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위와 같이 조선초기에는 왕희지를 비롯한 당태종ㆍ장욱ㆍ안진경ㆍ회소 등의 영향이 없지는 않았지만 가장 위력을 과시한 서체는 松雪體임을 알 수 있다.
2. 한 국
우리나라에서는 서평이라고 할 만한 자료는 매우 부족한 형편이지만 신라 최치원의 문집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고려 李奎報의?東國李相國集?에서는 종합적 평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는 자료는 이러한 문집속의 詩나 贊ㆍ序 등에서 서예가들의 평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조선시대 成俔의 이 서평은 매우 자상하면서도 진지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우리의 현실을 평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적어서 재상이 죽어도 碑碣을 세움이 드물데, 오직 큰 절의 옛터에는 이들이 많이 남아 있다. 지금 영남의 여러 절에 崔孤雲(857-?)이 찬한 것이 있고, 原州 資福寺碑는 王太祖가 짓고, 당태종의 글씨를 모아서 새긴 것으로 역시 하나의 기이한 보물이다. 玄化寺 비는 顯宗이 친히 篆額을 쓰고 周佇가 짓고 蔡忠順(?-1036)이 글씨를 썼다. 靈通寺 비는 김부식(1075-1151)이 짓고, 吳彦侯(미상 1117-8년경)가 써서 모두 奇古하나 字體에 다름이 있다. 普賢院 들에 반이 부러진 비가 있는데, 辭語가 豪健하고 자체가 굳세니, 元朝의 危素가 글을 짓고 虞集(1272-1348)이 쓴 것이어서 참으로 세상에 드문 보물인데 사람들이 보호하고 아끼지 않아 지금은 이미 깨지고 부서져서 남은 것이 없다. 正陵碑는 牧隱(1328-1396)이 지은 글을 柳巷 韓修(1333-1384)가 쓴 것인데, 또한 정묘함을 극하였다. 我朝에 이르러서 圓覺寺 비는 金乖崖가 짓고 伯氏 成任(1421-1484)이 쓴 것인데, 그 필법이 子昻과 더불어 대등하다 할 수 있다. 비록 安平大君 瑢이 쓴 英陵碑라도 또한 이보다는 나을 수 없으니, 후세에 보물로 삼는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我國少有好事者. 宰相之卒. 鮮用碑碣. 惟大刹古基多有之. 今嶺南諸寺有崔孤雲所撰. 原州資福寺碑則王太祖所製. 而集唐太宗書. 亦一奇寶也. 玄化寺碑則顯宗親篆其額. 周佇製而蔡忠順書之. 靈通寺碑則金富軾製而吳彥侯書之. 雖皆奇古. 然字軆有異. 普賢院原上有碑半折. 辭語豪健. 字軆遒勁. 元朝危素作而虞集書. 眞絶代奇寶. 而人不護惜. 今已破碎無餘矣. 正陵碑則牧隱所製而柳巷所書. 亦極精妙. 至我朝圓覺寺碑則金乖崖製而伯氏書之. 其筆法可與子昂頡頏. 雖瑢所書英陵碑. 亦不能過.後世寶之者必多矣.52)
이로 보아 우리나라의 비갈은 거의가 절에 많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시대의 審美語는 주로 奇古ㆍ豪健ㆍ精妙 등이 쓰이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1) 김생
김생(711-791)은 海東書聖으로 불리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서예가이다. 다음은 이에 대한 퇴계의 평에 해당하는 시 「次韻惇敍風穴臺金生窟二絶」중 한수 이다
창힐ㆍ사주ㆍ종요ㆍ왕희지 등 옛 사람들 애기 하지 마라
우리나라에도 천 년 전에 빼어난 사람 있었네.
기괴한 필법이 폭포수 바위에 남아 있으니
아 뒤따를 사람 없음이 한스럽구나.
蒼籒鍾王古莫陳. 吾東千載挺生身. 怪奇筆法留巖瀑. 咄咄應無歎逼人.53)
김생의 출생에 관한 것은 확실하지 않으나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쓴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는 “나이 80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ㆍ행서ㆍ초서가 모두 입신의 경지였다. 숙종 때 宋나라에 사신으로 간 洪灌(?-1126)54)이 翰林待詔 楊球와 李革에게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 폭을 내보이자 왕희지의 글씨라고 하며 놀라워하였다.”고 한다.55) 그는 특히 고려시대의 문인들에게 해동제일의 서예가로 평가받아 이규보의『東國李相國集』에서는 神品第一로 평하였다.
2) 행촌 이암․유항․독곡 성석린․영업․최흥효․정난종․이정보․
오언후․우집 등.
다음은 성현의 평으로 당시의 현실과 작가 개개인 실력의 우열을 매우 소상하게 기록한 것으로 두 글을 함께 보기로 하겠다.
우리나라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비록 많다고 하지만,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은 적다. 金生이 글씨를 잘 써서 細字에 있어서 아무리 작아도 모두 정밀하였다. 杏村(1297-1364)과 子昻(1254-1322)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筆勢가 서로 적수였으나, 行書와 草書를 자유롭게 써내려 가는 것은 마땅히 양보하여야겠다. 柳巷 韓修도 또한 유명하다. 그의 필법은 굳세며 晉 나라 필법을 많이 체득하였다. 그가 쓴 玄陵碑는 지금도 남아 있다. 獨谷 成石璘(1338-1423)의 글씨는 縝密할 뿐인데, 나이 80세에 健元陵碑를 썼는데도 조금도 筆力이 쇠하지 않았다. 당시 崔興孝(미상 1380년대)56)란 선비가 있었는데, 庾翼의 법을 본받아 자칭 글씨를 잘 쓴다고 하면서 항상 붓 주머니를 가지고 여러 관청이나 大家를 찾아다니면서 글씨를 써 주었는데, 字體가 거칠고 비루하였다. 안평이 초대하여 글씨를 썼으나, 마침내 찢어서 벽을 발라버렸다. 伯氏 成任57)은 仁齋 姜希顔(1417-1464)ㆍ東萊 鄭蘭宗(1433-1489)58)과 더불어 당시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으로 불렸다. 인재는 성품이 글씨 쓰기를 꺼렸으므로 세상에 전하는 手跡이 드물고, 나의 백씨는 병풍·족자를 많이 썼는데 그중에서도 圓覺寺碑는 더욱 묘에 들었다. 成宗이 그 필적을 보고, “잘 썼다. 명성은 헛되이 얻은 것이 아니었구나.” 하였다. 동래는 글씨에 많은 힘과 공을 들였다.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써 주어서 세상에 유포된 것이 또한 많으나 柔弱하여 볼 만한 것이 못 된다.
我國善書者雖多. 而有楷範者蓋寡. 金生能書. 細而毫忽皆精. 杏村與子昂一時. 而其筆勢與之敵. 然行草縱橫則當讓矣. 柳巷亦有名. 其書遒勁. 多得晉法. 所書玄陵碑. 至今猶存. 獨谷之書. 但縝密而已. 八十書健元陵碑. 筆力不衰. 時有士人崔興孝. 效庾翼之法. 自稱善書. 常持筆橐. 巡歷諸司諸大家. 揮灑與之. 字體麤鄙. 安平邀請書之. 遂割而塗諸壁. 伯氏與姜仁齋鄭東萊. 號一時善書. 仁齋性本憚書. 其跡罕傳於世. 伯氏多書屛簇. 而其書圓覺寺碑尤入妙. 成宗覽其筆跡曰. 善哉名不虛得也. 東萊於書多致力用功. 人有求者. 不憚書而與之. 故流布於世者亦多. 然柔脆不足觀矣.59)
同知 李廷甫가 글자를 잘 쓰지 못하여 글자가 行을 이루지 못하였다. 동부승지에 제수되어 啓를 올릴 적에 끝에 ‘依允’ 두 자와 御名을 썼는데, 成宗이 이것을 보고 전교하기를, “승지가 스스로 쓰지 아니하고 어린 아전을 시켜 쓴 것이냐.” 하였다. 승지 등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부승지 자신이 쓴 것이옵고, 대신 쓴 것이 아니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글하는 집 자손으로 文地에 출신하였으면서 어찌 이와 같이 졸하냐.” 하고, 드디어 시를 짓고 幷書하여 바치라고 명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웃었다.
提學 崔興孝는 글씨 잘 쓰기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 필적은 오로지 晉 나라 庾翼의 體를 본받아서 비록 運筆은 익숙하나 거칠고 상스러운 모양은 면하지 못하였다. 태종이 親政하던 날, 제학이 이조 낭청으로 입시하여 사람의 告身을 쓰는데 붓을 놀려 그림을 그리면서 한참이 지나도록 해놓은 게 없었다. 金宗瑞(1390-1453)가 병조 낭청으로서 옆에 있다가 한번 붓을 들어 수십 장을 써 내렸다. 다 쓰고 나서 옥새를 찍으니, 자체와 옥새 자국이 모두 단정하였다. 태종이 돌아보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쓸 만한 인재다.” 하여 김종서가 이로 말미암아 이름을 떨치었다.
李同知廷甫. 拙於書字. 字不成行. 拜同副承旨. 啓曰尾. 書依允二字及御名. 成宗覽之. 傳曰. 承旨不自書而令兒吏書之乎. 承旨等啓曰. 此同副自書非代手也. 傳曰. 以文子文孫. 出身文地. 而何如此蹇拙. 遂令作詩幷書以入. 見者皆笑.
崔提學興孝以善書名於世. 其蹟專倣晉庾翼之體. 雖運筆純熟. 未免麤鄙之態. 太宗親政之日. 提學以吏曹郞廳入侍. 書人告身. 弄筆成畫. 良久未就. 金宗瑞以兵曹郞廳在傍. 一筆揮數十張. 書畢踏璽. 字體璽跡. 並皆端正. 太宗顧謂左右曰. 此眞可用之才. 宗瑞由是發揚.60)
이와 같이 여러 서예가들 중에 본받을 만한 사람과 서품을 들었는데, 글씨는 김생의 정밀함, 행촌의 필세, 독곡의 필력을 들었으며, 비록 썩 좋은 글씨가 아니더라도 각각의 좋은 점은 치키고, 모자라는 점은 드러내어 평함으로 후세의 본보기로 삼게 하였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다.
3) 안평대군
조선초기의 서예는 안평대군을 대표로 삼을 수 있다. 그는 특히 조맹부 서체를 본받았는데 평하는 이는 오히려 조맹부에 앞선다고 하였다. 이에 최항과 박팽년은 중국 사신인 倪謙과 司馬恂이 왔을 때 안평과의 만남에서 일어난 일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평을 각각 序하거나 시로 읊었다. 아래는 최항의 「匪懈堂詩軸序」에서 가려 옮긴 것이다.
오직 우리의 안평대군이 종사에 꽃 같은 중요한 희망이다. 대아는 일반 무리 같지 않게 일찍이 한묵에 마음을 두고, 모든 서가들이 대성한 것을 모아 홀로 깊고 높은 경지에 이르니 그 굳세고 건장함은 왕희지와 같고, 단아함은 안진경과 같고, 풍류와 문채 빼어남은 조맹부와 같고, 진서ㆍ행서ㆍ초서 삼체 모두 함께 입신의 경지에 든 사람은 고금에 이 한 사람뿐이다.
1450년 3월 한림시강 예겸, 황문급사 사마순이 사신으로 왔는데 이들은 모두 학식이 넓고 성품이 고아한 선비이다. 이들이 안평대군을 알현함에 전에 유희로 쓴 몇 자를 보여주니 놀라 감복함을 느끼지 못하다가 드디어 글씨 쓰기를 청하기에, 이에 즉시 글씨 쓴 것 수백 장을 보여주니, 두 사람이 감탄하길 멈추지 못하자 대군이 시로써 이를 사례하더라.
세종대왕이 이를 듣고 가로대 “이 시는 대대로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자취가 묻히지 않게 하라” 하시었다. 대군이 기뻐하시고 장차 문사를 불러들여 聯和하려 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병이 있어서 여가가 없다보니 이내 세월은 가을이더라. 환관 윤봉이 사신으로 와서 두 사람 모두 편지로 안부를 묻고 또 문방보물을 대접하니 그 흠모함을 가히 알겠노라. 두 사신이 돌아가 황제에게 대군에게서 얻은 글씨를 드리니 황제가 보고 “매우 훌륭하다” 하고, 곧 나무판에 새길 것을 명하고 이로 하여금 세상에 전하게 하니 뛰어난 사람은 그 일이 심히 상세 하구나. 또 스스로 비단에 쓸 것을 청하니 장차 朝廷의 선비들이 따라서 구하였다.
주상전하께서 이를 들으시고 또한 기뻐하시며 오호라 이것이 어찌 국가와 왕실의 영광이라 이를 바가 않으리오. 유독 하고 싶은 대로 한 그 아름다운 우리 대군의 글씨가 어찌 세상에서 빼어나지 않다고 말할 것인가?
동방에 서예가 흥하지 않았으나 우리의 일대 인물로 하여금 다시 동진의 성함을 본받아 이로부터 번창하였다. 조정의 선비 역시 제일 좋은 글씨를 얻어 가첩으로 삼고, 모방한 것을 보배로 사랑하는 사람 또한 몇 인지 알 수 없지만, 대군의 글씨가 세상에 공이 있음이 어찌 우연이리오. 그리하여 대군의 글씨가 그 밖의 것보다 특별할 뿐만 아니라 유독 한 세대가 숭상하여 명예가 사해에 알려져 있다. 같은 옛 사람들보다 빛남이 있고 백세에 힘써 아는 자도 의혹함이 없으며 그 나머지 덕행이나 재예의 절륜함은 마땅히 세상에 거듭 나타남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위로는 연꽃 같이 오로지 아름답고 아래로는 많은 선비에게 경모를 받으니 또한 마땅하지 않으리오.
惟吾安平大君. 宗英重望. 大雅不羣. 嘗留心翰墨. 集諸家大成而獨詣. 其遒健似王. 端雅似顔. 風流文彩. 絶似趙學士. 而眞行草三體俱入神. 盖古今一人耳. 景泰初元三月. 翰林侍講倪謙,黃門給事司馬恂. 奉使而至. 皆博雅士也. 見大君嘗所戲書數字. 不覺驚服. 遂請揮翰. 於是立書數百紙以示. 二公嘆賞不已. 詩以謝之. 世宗大王聞之曰. 可傳此詩. 令不湮其跡. 大君喜. 將徵文士聯和. 無何. 在疚未暇. 及是歲秋. 太監尹鳳奉使而來. 二公皆書問安否. 且饋文房寶物. 其欽慕可知已. 二公之還也. 獻所得書于帝. 帝覽而嘉之. 卽詔繡梓. 俾傳於世. 鳳言其事甚詳. 又自以縑素請書. 蓋將應中朝人士之需也. 主上殿下聞之亦喜. 嗚呼. 此豈非所謂邦家之光也耶. 獨吾大君之筆擅其美. 豈所謂不世出者歟. 非惟興書道於東方. 使我一代人物. 復侔東晉之盛者. 自此倡之. 中朝之士. 亦得第一筆爲家帖. 寶愛摸擬者. 又不知有幾. 大君之筆. 有功於楷世. 豈偶然哉. 雖然. 書之於大君. 特餘事耳. 而尙獨步一世. 流譽四海. 參之古人而有光. 百世以俟知者而不惑. 則其餘德行才藝之絶倫. 當益見重於世. 可類推矣.上以荷至尊之嘉美.下以得多士之景慕.不亦宜乎.61)
다음은 박팽년이 內翰 倪謙과 司馬右史 두 중국 사신이 비해당에게 시첩을 준데 대해 쓰면서 비해당의 글씨 풍모를 상찬한 시이다.
글씨를 좋아한 왕자가 글씨 공부를 즐기니
이때 또한 조맹부 풍류가 유행하던 때라.
아름다운 바탕에 꽃을 꽂으니 자태는 더할 나위 없고
신비한 빛이 해에 뻗치니 기이함이 더욱 많구나.
오래도록 묘수를 흠모하는 사람 적더니
과연 높은 이름을 보고 천하가 다 알더라.
나에게 아계견 한 필 있으니
붓 끝에 무르녹은 재주 아끼지 말아 주오.
好書王子喜臨池. 松雪風流又一時. 美質揷花無盡態. 神光射日更多奇. 久欽妙手人間少. 果見高名天下知. 我有鵝溪一匹絹. 濡毫莫惜掃淋漓.62)
성현이 쓴 ?용재총화? 는 우리나라 국정에 대한 자료를 전하는 산문집이며 금석문의 현황과 역대명필을 들고 또 평을 가한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서 그는 안평대군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安平의 글씨는 오로지 子昻의 글씨를 본받았는데, 豪邁함은 서로 상하를 다투며 늠름하여 날아 움직이는 것 같다. 일찍이 倪侍講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篇題’ 2자를 보고, “이것은 凡手가 쓴 것이 아니니 내가 꼭 만나 보았으면 좋겠다.” 하여, 왕이 안평에게 가서 보도록 명하였다.
시강이 그의 필적을 좋아하여, “지금 중국에서는 陳學士가 글씨를 잘 써 이름을 떨치고 있으나 왕자에게 견준다면 미치지 못한다.” 하고, 더욱 禮貌를 갖추고 마침내는 글씨를 받아 가지고 갔다. 그 뒤에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글씨를 사왔는데, 바로 그의 글씨이므로 안평이 크게 기뻐하며 득의만만하더라.
安平之書. 專倣子昂. 而其豪邁相上下. 凜凜有飛動意. 倪侍講嘗奉使到國. 見篇題二字曰. 此非凡手所書. 吾欲要見此人. 上命安平往見之.
侍講慕其筆跡曰. 今陳學士善書. 擅名中國. 然比王子則不及也. 益加禮貌. 遂受書而去. 其後我國人買書中國而來. 乃其手跡也. 安平大喜自得.63)
선초 서예가의 대표는 바로 안평대군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詩ㆍ書ㆍ畵에 두루 능하여 三絶이라 불리었다. 그리고 그는 식견과 도량이 넓었으며 武夷精舍나 淡淡亭이란 도서관 같은 정자를 지어 여기에 많은 책을 모아놓고 당시의 문인 묵객들을 초청하여 詩會를 여는 등 호방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 또한 松雪體를 본받았지만 자신만의 호방한 기질에 활발한 기풍을 더하여 더욱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 영향이 조선전기에 크게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퇴계
퇴계는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사상가이다. 그는 정교의 이념이었던 유학을 이론적으로 깊이 연구하여 理氣論의 꽃을 피웠다. 그의 중심 사상은 敬이었다. 퇴계는 사상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일가견이 있어 후학들이 이의 글씨를 흠모하는 이가 많아 비록 재미로 여가를 즐기다 버린 것도 모아 정성들여 첩으로 만들곤 하였다. 아래는 유성용이 이굉중이란 사람이 이러한 글씨를 모아 첩을 만들어 소장하고 있는 퇴계의 글씨를 보고 평한 것이다.
德은 가운데로 모이고 文은 밖으로 보이는 것으로 초목에 根本이 있어서 가지ㆍ잎ㆍ꽃ㆍ열매가 무성한 것 같은 것이다. 이제 이 書簡帖을 보니 비록 재미로 쓴 여분이지만 모두 삼엄한 법도가 있고 좋은 관상자가 이를 봄으로 하여금 精義의 형태인 妙道를 앎에 족하다. 오호라 번성함이여 이 어찌 근본 없이 능히 되리오. 내 친구 이굉중은 선생의 문하에서 오래 공부를 하면서 한마디씩 모은 것을 한 글자로 갖추고 수습하여 이를 보배로 소장하였다가 간간이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받들어 玩賞함에 감탄하기를 굉중이 다시 받드는 것은 隴雲 사이에 謦欬64)하는 것 같구나. 삼가 뒤에 몇 마디를 적고 돌아 왔다.
德藴於中而文見於外. 如草木之有根本而枝葉花實繁茂也. 今觀是帖. 雖遊戲翰墨之餘. 皆森然有法度. 使善觀者見之. 足以知妙道精義之所形. 嗚呼盛哉. 斯豈無本而能然哉. 余友李宏仲久遊先生之門. 得片言隻字. 悉收拾而寶藏之. 間以示余. 余奉玩感歎. 如與宏仲再承謦欬於隴雲之間. 謹題數語于後而歸之.65)
퇴계의 글씨에는 삼엄한 법도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의 학문관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학문관은 ‘居敬窮理’에 있었다. 이황에게 있어서 “경이란 일심의 주재요, 성학의 처음으로 끝을 이루는 요법이다. 본래 경이란 畏敬ㆍ主一無適ㆍ整齊嚴肅 등을 뜻한다. ‘주일무적’이란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이 다른 데로 달아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는 것을 말하며, ‘정제엄숙’ 이란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마음가짐을 엄숙하게 하는 것”66)을 말한다.
5) 황기로
黃耆老(미상 1530년대)는 호가 孤山으로 초서를 잘 써서 초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洪聖民은 윤두수와 함께 西人으로 유능한 선비이다. 그는 1567년 賜暇讀書를 한 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고산이 글씨 쓰는 것을 보면 장난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표구를 해보니 진가가 보인다는 아주 소박한 평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묵지가 북명어를 몰아내니
이것이 고산처사의 글씨라네.
휘호할 당시에는 장난 같았으나
집의 벽에 둘러치니 우리 집이 호화롭구나.
墨池驅出北溟魚. 云是孤山處士書. 揮灑當時惟戱劇. 繞來堂壁侈吾廬.67)
고산의 글씨는 “당나라 懷素의「自敍帖」중 狂草와 비슷하다. 조선 서예사에서 초서로는 金絿(1488-1534)ㆍ楊士彦(1517-1584)과 함께 제1인자라는 평을 받아왔으며, 후대에 크게 영향을 미쳐 비슷한 풍이 유행하기도 하였다”68)고 한다. 특히 김구와 안평대군ㆍ양사언ㆍ한호(1543-1605) 등과 함께 조선시대 전기 서예계의 4대가로 손꼽힌다.69)
6) 박눌
양반가의 자손이라면 집안의 권위로도 출세를 하였겠지만 朴訥은 천민이지만 글씨에 천품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가난하고 천한 가정의 아들이어서 주위의 눈초리가 두려워 칭찬 한마디 듣지 못하던 그를 士浩 姜渾(1464-1519)이 발굴하여 칭찬하고 더구나 박눌의 글씨 뒤에 평까지 하여 주었으니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라고 할 수 있다. 金馹孫의 말에 의하면 “옛날 사람은 문자를 받는 영광을 벼슬보다 귀중하게 여겼으니, 재주 있기가 진실로 어려운 것이요 또 알아줌을 받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강군의 글이 한번 나옴에 박눌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朴耕(?-1507) 역시 이로 인해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으니 박눌 부자가 이 글을 얻은 것은 벼슬을 얻은 것보다 더 귀중한 것이다. 세상에 벼슬을 얻고도 기록할 만한 재주가 없는 자가 옛날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았는가. 이로써 말한다면 조물주가 반드시 박눌 부자에게 후하게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김일손은 강사호의 칭찬이 박경 부자에게는 큰 행운이라며 아래와 같이 평하였다.
옛날 강목교감청에 있을 적에 박경이 수예청의 사자관으로 와서 오랫동안 같이 지냈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잘 알게 되었으니, 그는 거의 잠부와 같은 사람이다. 박경이 집이 가난하여 글씨를 써서 먹고 살기는 했으나 그의 뜻은 글씨로 먹고 사는데 있지 않았다. 하루는 그 집에 가서 그 아들을 보니 참으로 소를 잡아먹을 기상을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미목이 시원하게 빛나고 묻는 말에 차근차근히 대답하여 침착하고 의젓하게 법도가 있었으니 바로 박눌이었다. 붓을 잡고 글자 한자를 썼는데 크기가 말만하게 되었고 신이 있어 움직이는 것 같으므로 내가 깜짝 놀라서 박경이 아들을 잘 두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애가 만약 양반집에 태어났더라면 반드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을 리 없고, 이 애가 만약 중국 같은 일 좋아하는 나라에 태어났더라면 반드시 학사와 노유가 숭상하는 바가 되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 것이며, 반드시 왕공들이 아끼는 바가 되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 것이므로, 가난함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국법에 구애되는 것이 많고 나라의 풍속이 인재를 숭상하지 않아서 박눌 부자로 하여금 이렇게 곤궁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일찍이 그 부자를 칭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니 지금 다행히 강군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게다가 글까지 받게 되었으니, 이것은 박씨 부자에게 있어 큰 행운이다. ····생략····
강사호가 어느 날 남쪽으로 내려 갈 적에 내가 박눌의 서첩을 노자 대신 주었더니 강사호가 대단히 귀중하게 여겨 감히 자신이 갖지 못하고 그 아버지에게 드리려고 하였으니, 강사호는 그 문아를 혹독히 좋아하고 그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데 방법을 가리지 않은 자라고 할만하다.
昔年在綱目校讎廳. 朴耕.以寫手隷廳久. 與處而得其爲人也殆潛夫之類也. 耕家貧書於食. 而其志則不在書也. 一日. 造其廬見其子.眞是窺牛兒也. 眉目朗然. 應對從容. 沈鬱有度.卽訥也. 操筆就一字如斗大. 活動有神. 余驚焉.知耕之有後也. 使此兒生於華族. 未必不顯於世. 使此兒生中州喜事之地. 未必不爲學士老儒之所尙. 未必不爲王公之所憐. 不至飢寒如此. 惜國法有拘. 不尙人才能. 使訥父子困也. 然猶未嘗爲一言以記美. 今幸得爲姜君所賞. 又侈以文. 乃朴家一遇也. 古人文字之榮. 重於爵祿.才固難. 而遇賞亦難. 姜君之文一出. 訥之名重於世. 耕亦因而顯. 訥父子得此文重於得位. 世間得位而無才能可紀者. 古今凡幾人.以此言之. 造物未必不厚訥父子也. ····생략···· 姜一日南行. 余以訥帖爲贐. 姜鄭重之. 不敢自有而欲上其親. 姜其酷於文雅而悅親無方者也.70)
庶孼 출신인 박경은 글씨를 잘 써서 校讐廳의 寫字生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박눌 또한 글씨를 잘 썼다. 하지만 천민출신이라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한 예로 당시 사회의 일면을 짐작하게 한다.
Ⅲ. 서예 미학
미의 관념은 순수해야 된다. 미의 관념은 실용성도 교화 목적도 탈피하여 어떠한 예술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71) 서예가 미학의 범주에서 논하자면 논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서예는 무생명인 먹ㆍ붓ㆍ종이에 글을 주제로 하여 제작하는 예술행위이다. 이 예술의 기본은 점ㆍ선이며 나아가 이들의 조합으로 형성된 글자와 문장의 유희이다. 이러한 점획과 결구 또는 장법에 생명감과 인간의 정감이 배어 있어야 미학의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한 붓의 작용과 먹칠에 만 머문다면 예술적 가치도 미학적 가치도 거론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예는 형질과 성정의 변증법적 예술이라 할 수 있다.
1. 형질미
글씨가 처음부터 어떠한 형식이 있어서 그를 근거로 만들어 진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자연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발전을 거듭하면서 형식과 형질의 법이 제정된 것이다. 이것이 자연미와 이의 응용으로 표현되어져 사람들에게 심미감을 얼마나 더해 주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1) 자연미
서예미의 극치는 자연미를 제일로 여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의 자연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겠다. 먼저 崔恒은 왕희지의 이름이 지금까지 유전할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부드러운 필봉에 자연스럽게 안개가 서림을 사랑했음”에서 부터라고 다음의 시에서 말하고 있다.
부드러운 필봉에 검은 안개 엉김을 사랑한
중서령의 명예를 몇이나 칭송할지.
우군은 너에게 힘입어 난새와 붕새 등에 올라
천년세월동안 그 이름 유전할 수 있었구나.
爲愛柔鋒黑霧凝. 中書令譽幾人稱. 右軍賴爾騰鸞鳳. 千載流名可謂能.72)
왕희지의 글씨는 서예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예술품이다.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중화를 이루고 인품 또한 가장 중화적인 사람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또한 이에 못지않은 사람이 있다. 바로 안평대군 비해당이다. 다음은 최항이 비해당의 시축에 序한 글이다.
천하의 기예는 모두 자연의 이치요, 진실로 그 이치를 만드는 것은 반드시 그 묘함이 모여서 된 것이다. 나무를 깎아 악기를 만드는 사람은 손 따라 마음 응하고, 소 잡는 사람은 눈과 신이 만나네.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야 나무를 납작하게 깎을 수 있고 도끼를 잘 움직여야 소를 잘 잡을 수 있는 것이지 처음부터 어찌 신의 뜻이 있으리오. 그 이치는 이미 연구되어 바야흐로 신의 뜻이 아닐 수 없을 뿐이다. 군자의 글씨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이미 그 이치가 만들어 진 것이 곧 비동하는 변화의 신묘한 멋이다. 처음부터 말로 깨우칠 수 없지만 그렇지 않고 즉 무리들이 점획의 끝만 전념하면 다만 뜻을 상함에 족하니 아는 사람은 취하지 않는다.
天下技藝. 皆有自然之理. 苟造其理. 必臻其妙. 刻鐻者手隨心應. 解牛者目與神遇. 扁之斲輪. 郢之運斤. 初豈有意於神哉. 其理已究. 自不得不神耳. 君子之於書亦然. 旣造其理. 則飛動變化神妙之趣. 殆不可言語喩. 不爾則徒事於點劃之末. 祗足以喪志. 識者不取.73)
이와 같이 자연은 자연일 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 자연을 지배하려하고 인위적 힘을 가한다. 하지만 자연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래서 노자는 자연이 “함이 없지만 하지 않음도 없다”라고 한 것이다. 글씨 또한 처음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지만 점차 단계가 성숙하게 되면 有爲와 無爲가 교차하는 것이다.
2) 재현과 표현
글씨는 자연의 형상을 본받아 만들어 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蔡邕(133-192)은 “書는 자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예를 논함에 곧잘 자연의 형상에 비유하여 말하곤 한다. 즉 조맹부는 “아들 자의 자(子)는 새가 날아가는 형상을 본받고, 할 위자의 자(爲)는 쥐의 여러 형태를 생각하여 쓴다”라고 한다. 徐巨正(1420-1488)은 “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초서의 세력이 새가 날고 용이 뛰듯”한다고 연상하였다. 다음은 서거정이 초서의 형세와 필획의 변화를 자연형상을 연상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대는 어디에서 초결을 얻었는가!
필획은 모두 기이하고 뛰어나네.
지금 나를 위하여 두어 장 쓴 것을 보니
마루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하다.
난새가 춤추는 듯, 봉황이 나는 듯, 용이 뛰는 듯,
옥수 가지에 철끈이 얽히고 설켰구나.
여윈 뼈와 통통한 살이 조화를 이루어
날아오르듯 변화무쌍함은 귀신이 놀래겠구나.
君從何處得草訣, 筆劃超諸頗奇絶. 如今爲我書數張, 風雨颯爽生中堂. 鸞翔鳳翥虯龍躍, 玉樹交柯纏鐵索. 一肥一瘦骨肉均, 飛動變化驚鬼神.74)
이 글만 읽어보아도 이 작품의 세력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구로 보면 “여윈 뼈와 통통한 살이 조화를 이루어 飛動하는 변화가 귀신이 놀란 정도”이고, 장법으로 보면 “난새가 춤추고 봉황이 날고 용이 뛰듯 서로 얽히고 설킴”을 연상할 수 있다. 이러한 글씨의 기상이 “비바람이 몰아치듯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생동감이 느껴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이 자연을 연상하여 느낀 그 정감을 부호화된 문자에 옮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移情作用’이다.
서예미에서는 中和美를 최고로 삼는다. 또한 중화미에 가장 가까운 서예가는 왕희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희지를 서예의 표준으로 삼는다. 成俔 역시 왕희지를 표준으로 하여 필법을 논하고 있다.
나의 형 필법의 신기함은 귀신이 다시 온 듯
글씨는 우군같이 천진에 가깝구나.
세상의 어떤 사람이 필봉 다툼을 옳게 여기였는가!
가을 뱀과 봄 지렁이 빈 그물같이 어지럽게 얽혀있네.
등나무를 깎은 듯 달빛같이 신선함은 서릿발 같고
단계채석의 金蛇같이 빛나네!
비를 머금은 먹구름이 홀연히 휘 뿌린 듯
나는 난새 춤추는 봉황이 앞뒤를 다투듯.
銀鉤鐵劃 종횡으로 산란함은
왕일소의 자취이지 장백영의 재주는 아니구나.
보는 사람 모두 靑李帖을 구하려 몰려오니
장차 문 앞에 쇠말뚝을 세우려 하네.
내가 지금 진적을 사모하여 따르는 것이
집닭이 들오리 뒤 쫓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같구나.
吾兄筆法神復神. 字如右軍逼天眞. 世上何人肯爭鋒. 秋蛇春蚓空紛綸.
剡藤皎皎新如霜. 端溪75)彩石金蛇光. 墨雲含雨忽揮灑. 翔鸞舞鳳爭頡頏.
銀鉤鐵劃亂縱橫. 逸跡不數張伯英. 觀者咸求靑李帖. 門戶須將鐵作闑.
我今相隨慕眞跡. 不棄家鷄隨野鶩.76)
우군의 글씨처럼 신선하고 천진한 필법이 “가을 뱀과 봄 지렁이 같이 뒤섞여 어지럽네”란 바로 초서 필획의 使轉이 분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먹구름에서 빗줄기가 쏟아지듯 한 필세와 난새와 봉황이 재주를 겨룸은 바로 왕희지의 자취이지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필세의 중화 즉 “가을 뱀과 봄 지렁이”, “쏟아지는 빗줄기와 봉황의 춤”같이 서로 반대되는 정황이 하나같이 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화이며 “변증법적 통일의 조화”라고 하는 것이다. 자연의 형상을 서예에 재현하는 예는 매우 많다. 李瑀 또한 그의 저서 「論書法」에서 옛 서예가의 글씨를 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연의 형상을 필법에 적용하였다.
노련한 규룡이 돌을 가지고 놀듯, 목마른 준마가 재빨리 내로 내 닷 듯, 놀랜 뱀이 풀 속으로 재빨리 숨 듯, 새가 숲에서 빠져나와 급히 날아가듯 한 것 등이 있는데, 이들이 어찌 필법의 묘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如老虯抉石. 渴驥奔川. 有如驚蛇入草. 飛鳥出林. 何莫非筆法之妙.77)
이와 같은 자연형태의 묘함을 서예에 재현한 것을 東國에서 말하면 “김생의 金鉤와 玉索, 고운의 古鼎과 石鼓, 영업의 고아하고 건장함, 안평의 호걸스런 일품이다.”78) 그리고 이것을 근대어로 말하면 “난이 바람에 춤추듯 은일한 자태는 흐르듯 움직이는 것 같고, 혹 노송이 눈에 덮여 반짝이고 古氣가 속세에 빼어난 것 같다”79)등의 말로 평하였다. 이렇게 자연의 형상을 서예에 재현한다. 그러나 회화와 서예는 그 재현의 방법에 있어서 다르다. 회화는 눈에 보이는 자연형상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반면 서예에서는 부호화된 글씨에 그러한 자연형상을 연상하게 하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2. 성정미
조선 초기 서예 미학은 성정의 바탕인 마음을 매우 중요시 한 것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곧 “書는 心法” 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여러 곳에서 접할 수 있다. 서예는 글자와 문장을 소재로 삼는 예술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글자의 결구형식을 통하여 특수한 정감부호를 창조함으로 어떤 예술의 경지를 만드는 것이다. 이 정감부호에 어떤 정신의 의식이나 심미감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서예이다. 崔恒은 「匪懈堂詩軸序」에서 비해당의 글씨를 평하면서 “書卽心畵”ㆍ“心正筆正”ㆍ“書如其人”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오직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바른즉 붓도 바르다. 그 글씨를 보면 그 사람됨을 가히 알 수 있다. 대군은 영웅호걸의 자태로서 부의 지극함을 존경하니, 이에 능히 담박함을 스스로 지키고 선함에서 즐기고, 인에 의하여 예에서 노니라. 비해당을 열고 좌우에는 도서를 마련하여 아침저녁으로 유교의 바른 의리를 인용하여 서로 공맹을 이야기 하니 마음에 있는바가 진실함을 가히 알리라. 그러므로 서화 사이에 나타난 형질이라는 것은 용모에 따라 법도가 삼엄함을 가히 볼 수 있으며, 진실로 예쁜 것을 예쁘게 하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이 지금의 대명으로 마땅히 하늘에 문치가 성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 안에 뜻있는 선비는 오랜 세월을 공부하여 출세하고 때에 따라 이름이 드날린 사람, 반드시 문채와 바탕이 함께 갖추어져 찬란한 모양을 한 사람이 있더라.
余惟書. 心畫也. 心正則筆正. 觀其書. 可知其爲人焉. 大君以英豪之資.尊富之極. 乃能淡泊自守. 樂於爲善. 依仁遊藝. 開匪懈堂. 左右圖書.日夕引儒雅. 相與譚孔孟. 亹亹不解. 心之所存. 固可知已. 故其形於書畫之間者. 從容中法度. 森嚴可觀. 信非規規趨姿媚者所可彷彿. 厥今大命當天. 文治蔚興. 宇內有志之士. 臨池老歲月. 起而鳴於時者. 必彬彬有人矣.80)
성정의 수양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평대군은 “비해당을 열고 좌우에는 도서를 마련하여 아침저녁으로 유교의 바른 의리를 인용하여 서로 공맹을 이야기 하니 마음에 있는바가 진실함을 가히 알리라. 그러므로 서화 사이에 나타난 형질이라는 것은 용모에 따라 법도가 삼엄함을 볼 수 있다.”고 하였기에 “인에 의지하여 예에서 논다.”고 한 것이다. 그의 영특하고 준수한 호걸의 자태와 유교의 의리를 생활지표로 삼는 진실한 인품성은 바로 서화에 移入되어 나타난 것이다. 기능이나 정신이나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기능에 정신이 정신에 기능이 융화된 즉 “心手雙暢”의 경지를 요구하는 것이 서예이다. 이로서 손은 마음이 하는 바를 모르고 마음은 손이 하는 바를 모르는 사이에 작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金馹孫 또한 가슴속에 묘함을 간직하고 있어야만 밖으로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서화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정신으로서 그 묘를 이해해야 하는 것은 書畵나 詩文과 같다. 흉중의 풀숲과 같은 모양과 거의 가깝다. 흉중에 소유한 것이 없으면 어찌 꽃을 피울 수 있겠는가?
夫余不知書畵. 猶能以精神會其妙. 書畵詩文. 殆一樣胸中之土苴也. 胸中無所有. 何能發其華耶.81)
서화에 마음이 중요하다는 점은 퇴계가 더욱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글씨를 쓰는 것은 명필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그래서 서예에서도 “專一”을 요구하였다.
字法이란 본래 心法에서부터 나온 것이니
글씨 익힘은 명필 소리 들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창힐과 복희가 만들 때는 저절로 신묘함이 나왔네,
魏와 晉82)의 그 풍류라고 어찌 방탕하고 성긴 데에 흘렀겠는가.
吳興83)에서 걸음마를 배우려니 옛것마저 잃을까 걱정되고,
東海84)를 본받으면 헛될까 두렵네.
다만 모든 점획마다 한결같아야 하니,
인간의 헛된 회예 관계치 않으리라.
字法從來心法餘. 習書非是要名書. 蒼羲制作自神妙. 魏晉風流寧放疎. 學步吳興憂失故. 效顰東海恐成虛. 但令點畫皆存一. 不係人間浪毁譽.85)
이렇게 퇴계는 글씨공부는 어떠한 대가도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오로지 마음을 잘 다스려야 글씨 또한 바름을 강조하였다. 최립이 쓴 「退溪書小屛識」는 이렇게 마음의 글씨를 중요시한 퇴계의 글씨를 평한 글이다. 특히 퇴계가 평생토록 공부를 하고 꼿꼿한 정신 자세를 유지하였으므로 글씨 또한 단정하고 정중하며 굳세다고 평하였다.
대개 글씨는 마음의 획이다. 마음의 획이 형상하는 바에서 진실로 그 사람을 상상해 볼 수 있거늘, 하물며 선생의 글씨는 단정하고 정중하고 굳세고 긴밀하여 비록 초서를 쓰더라도 반듯하게 쓰지 않은 적이 없다. 평생토록 마음속에 공부를 잊지 않아서 반드시 이에 자취 아닌 것이 없다.
蓋書. 心畫也. 心畫所形. 誠足想見其人. 況先生書. 端重遒緊. 雖或作草而不離正. 平生心不放工夫. 未必不蹟於斯焉. 86)
서예를 크게 둘로 나누어 보면 內在인소와 外在인소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내재인소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감정을 전하는 것으로 성정을 말하는 것이요, 외재인소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것, 바로 붓으로 이루어지는 형태 즉 형질를 말한다. 그러므로 외재인소는 내재인소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또한 전면적으로 내재인소의 영향을 받는다고도 할 수도 없다. 이렇게 내재인소의 성정이 수양되어 나타난 意境美와 외재인소인 형질의 단련에 의해 발휘된 熟練美가 조화와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훌륭한 書品이 창조되는 것이다.
Ⅳ. 結 論
위와 같이 살펴본 바에 의하면 고려 말에서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조맹부의 松雪體가 조선 초를 거치면서 여러 書藝家에게 사랑을 받아왔으나 특히 匪懈堂이 꽃을 피웠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서예가들의 평은 과거의 평에 비해 독특성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중에 인품과 서품과의 연관성을 강조한 유성용의 “회암팔대자가” 는 우리나라 서예정신이 얼마나 도덕을 중시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조맹부는 자신만을 보호하려는 여린 마음에 의리를 버리었기에 의리를 중시하던 당시에도 너무 唯美主義에 빠져서 추하다는 평을 받아 왔었는데,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흠모한 경향이 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안평대군도 송설체에 능하였으나 나름대로의 호방한 기상을 살리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성현의 평은 매우 구체적이고 솔직하다고 할 수 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을 보더라도 보편적인 평은 당사자가 흠집이 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지적을 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용재총화?에서처럼 상찬할 점과 지양할 점을 상세히 평하기는 어렵다. 이로보아 성현 서평의 가치는 매우 높다 할 수 있다.
서예미학에서는 전통적인 중화미를 기본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화미를 가장 높이 실현한 서예가가 왕희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서예는 왕희지를 기준으로 하여 공부와 평가를 한다. 시대적으로 보아도 晉代의 운치를 가장 숭상하였다. 당나라의 法度나 송나라의 意나 원ㆍ명대의 態도 모두 운치로 말하면 진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화미의 정점 시기도 진대를 말하는 것이고, 서예가로 말하면 왕희지를 일컫는 것이다. 조선 초의 서예미 또한 이와 같음을 위의 여러 평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조선 초는 성리학을 政敎로하는 도덕중심 사회였다. 서예 역시 도덕의 중심인 마음을 중시하였다. 비해당도 퇴계도 서예의 기본은 마음이라는 “心正筆正”과 “心法卽字法”이라는 구절이 눈에 확연히 다가온다. 그 외에 이 시대는 김구ㆍ안평대군ㆍ양사언ㆍ한호 등과 함께 조선전기 서예 4대가로 불리는 인재를 배출하였다는 것은 매우 괄목할 만한 성과이다.
글쓴이 : 백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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