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연구의 기초개념을 5단계(問-勇-觀-感-思)로 설정해보았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개념 세가지를 먼저 소개하고자 합니다.
問
모든 학문의 출발점은 문제제기로 부터 시작된다.
풀려고 하는 문제가 있어야 그에 따른 사고를 하게되고 해결이 이루어진다.
서예의 이론도 작품의 제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작되는 이론과 작품은 신선하고 창조적인 에너지가 있다.
勇
발언의 용기가 필요하다.
20세기 초 백화운동을 전개했던 중국의 사상가 호적(胡適)은 "대담가설 소심구증(大膽假設,小心求證)"
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대담하게 가설을 세우고 조심스럽게 증거를 구한다"는 말이다.
한국의 서예 연구분위기는 대담한 가설보다는 조심스런 마무리에 더 마음이 가 있는 것 같다.
자기주장과 창조적 생명력이 담긴 서예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조금 덜 다듬어졌더라도
대담하게 발언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觀
보는 것은 예술표현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詩를 쓰는 사람도, 서예를 하는 사람도
대충 본 상태에서는 좋은 표현을 기대할 수 없다.
고등학교 시절의 경험을 되살려본다면 처음 석고상을 그리는 사람은
석고의 형상보다는 자기얼굴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보고 그리되 정확하게 석고의 본모습을 파악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서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법첩을 보고 쓰되 형태파악을 정확하게 하지 못하고 쓰는 경우가 많다.
석고뎃상이건 글씨임서이건 관계없이 관찰력이 부족하면
늘 습관적인 묘사에 머물게 된다.
이점에 유념하면서 <장천비>에 나타난 특징을 분석해보도록 하자.
<장천비>는 꼴이 다양하다. 장방형(長方形), 정방형(正方形), 편방형(偏方形)이 혼재되어 있다.
<장천비>는 글자의 대소가 천편일율적이지 않다.
상단과 하단 글씨의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대소의 차이가 매우 크다.
<장천비>는 필획의 굵기변화가 많다.
상단과 하단글씨에서 보듯이 필획의 비수대비가 심하다.
<장천비>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기정(奇正)과 참치(參差)변화다.
기정은 기우뚱하고 바른것을 말하고, 참치는 들쭉날쭉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임서하는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비뚤어지고 들쭉날쭉한 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는데, 이것은 큰 오류이다.
전통서론의 견지에서 본다면, 이것은 서예의 생명력을 고조시키는 핵심적 요소에 해당한다.
<장천비>에는 이러한 요소가 그 어느비문보다도 많이 담겨져 있다.
<장천비>는 변화가 많다. 동일자를 비교해보면 변화의 정도를 금방 알 수 있다.
같은 글자를 항상 다르게 쓰는 것은 명필의 필수 조건이다.
왕희지 <난정서>가 명필임을 증명하는데 있어서도
'之'자 20자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 언제나 강조되고 있지 않은가.
위에서 발견한 것 이외에도 <장천비>에는 다양한 특징들이 존재하고 있다.
사다리꼴, 역사다리꼴, 좌대우소(左大右小), 좌소우대(左小右大) 등등.
이러한 특징적 요소들은 어떤 면에서 아주 단순한 발견에 해당하지만,
실제 임서의 현실에 비추어본다면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한글고체에 나타난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자.
도판을 살펴보기에 앞서 잠시 질문할 사항이 있다.
한글고체의 법첩으로 어떤 텍스트가 사용되고 있는가?
조심스런 이야기이지만, 아주 전문적인 연구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경우 한글고체는 주로 현대작가들이 쓴 글씨를 본받고 있다.
이 말이 맞는다면, 결국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한글고체의 텍스트는 2차자료인 셈이다.
물론 2차자료에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2차자료는 아무리 잘쓴 것이라 해도 원래의 고전자료(1차자료)에 미치지 못한다.
서단에서 암묵적으로 통용하는 "법첩이 스승이다"라는 말은 바로 1차자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법첩이 갖는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제시할 <용비어천가>글씨가 속 시원하게 의문을 풀어줄 것이다.
고전자료를 버려둔 채 후대인들이 재생산한 자료에 의존하여 임서하는 것은
마치 오리지널(법첩)을 멀리하고 스승의 체본을 공부하는 것과 같다.
2차자료를 통한 학습법은 장기적인 한글연구를 불가능하게 하고, 수준을 약화시키는 이유가 된다.
앞으로 한글서예가 창조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전자료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형태상으로 보아 한글고체는 고전자료 즉, <용비어천가>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한글고체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용비어천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자세히 관찰해보도록 하자.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용비어천가>는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한글고체와는 너무나 다르다.
125장이나 되는 장편의 <용비어천가>에는 한문서예 못지않은 다양한 변화가 존재하고 있다.
글자의 대소변화, 굵기의 변화, 기정(奇正)과 참치(參差)의 변화, 동형반복의 절제는
변화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천비>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장천비>와 <용비어천가>의 도판분석을 통해
"보는 것(觀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전통학습법에 의하면 글씨를 관(觀) 하는 것은 명필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예로부터 글씨에 통달한 선인들은 독비(讀碑)와 독첩(讀帖)을 특별히 강조했다.
선인들은 글씨의 특징을 분명하게 파악한 후 글씨를 쓰는것이 효과적임을 알았던 것이다.
※서예세상에서 옮겨온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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