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서예의 흐름
한국에서 90년 대 이후에 새로운 서예미학을 내세우면서 서예의 해체 내지 회화성의 도입을 주로 하는 서예운동을 ‘현대서예’라고 부르고 있다. 이 명칭은 학계에서 공인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상에서 거의 공식 용어처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서예라고 할 때는 ‘현대’라는 언어를 어떤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역사에서 시대 구분의 방편으로 사용하는 ‘현대’라는 말은 시간적 개념으로 사용한다. 일반적인 뜻은 ‘오늘 날의 시대’라는 뜻이다. 현대서예라고 할 때는 단순히 역사적 시간의 개념, 또는 오늘의 시대 라는 뜻으로 해석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왜냐면 미학적 특징을 갖는 예술 운동(서예미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예의 미학적 특성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송하경은 80년 대 후반에 ‘신서예’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서예미학을 주장하였다. 신서예 이론을 내세웠던 시기가 현대서예가 등장하는 시기와 시간적으로 서로 비슷하므로 관련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현대서예의 정의에 참고도 될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좁은 의미에서는 전통 서예와 대칭 개념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서예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한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하였다.
전통 서예와는 반대의 입장이지만 전통 서예를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고, 전체로서 수용하자는 것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언급이다. 전통 서예는 그대로 두고, 전통 서예의 정의에는 벗어나는 새로운 서예도 서예로 인정하자는 것이 타당한 설명이 될 것이다. 이로서 서예 영역의 확대를 꾀하는 동시에 발전하자는 취지로 읽을 수 있다.
신서예의 또 하나의 기조로서 탈 장르, 탈 권위, 탈 중심사상인 포스트모더니즘 미학 이론을 바탕에 깔고 있다. (송하경. 신서예정신. 서예문화 p28. 2002) 그렇다면 서와 화라는 장르적 구분을 벗어날 수 있다. 전통적인 동양미학에서 서와 화는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다. 서예가 아닌 문인화의 차원에서 보면 시서화 삼절을 표현하는 예술의 장이었다. 사군자에도 으레 글씨가 들어갔다. 광복 이후에 서와 동양화의 장르 구분이 분명해지면서 미술협회의 산하 단체로 가입한다. 최근에는 서와 사군자의 분리도 나타났다. 한국 서예사를 일람하다보면 통합보다는 분열의 길을 걸어왔다. 예전에는 서화동원론에 의하여 서와 화를 하나의 장르로 수용하였다. 그렇다면 서와 화의 장르적 구분을 없애자는 주장은 새로운 주장이기보다는 과거로 회귀하자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서예가 회화성 도입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제 자리를 찾아가자는 주장이다. 제자리라고 하여 과거로 되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새로움이 가미된 형식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좁은 의미로 따진다면 서예가 그 시대의 통상적인 서예의 범위를 벗어나서 새로운 서예를 시도할 때도 현대서예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서예를 폄하하고 중국의 고법을 받아들여 법첩을 주장한 김정희도 이런 개념에서 보면 현대서예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반대로 법첩을 벗어나서 창의성이 돋보이는 서예도 현대서예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서예에 변화를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경에 일본에서 서예를 두고 미술이냐, 아니냐,의 논쟁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미전을 개최하였을 때에 역시 서예가 미술이냐, 아니냐,의 논쟁이 있었다. 그 논쟁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서예를 두고 미술의 여부를 따지고 있는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현대서예가 왜 회화성 도입을 고집하는 지를 이해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현대서예에서 표현 영역의 확장을 꼽기도 한다.
“현대서예는 표현 내용과 재료 및 기법에서 보다 개방적이며, 자유를 추구함으로서 서예 영역의 확장을 꾀한다. 재료 및 기법의 다양화를 꾀한다. 전통 서예의 재료인 지,필,묵 이외에, 천, 캔버스, 골판지, 캔트지 드을 재료로 쓴다. 유화용 붓, 나무, 젓가락, 칼, 털, 담배 꽁초 등도 붓을 대신할 수 있다. 이럴 때는 용필에서도 차이가 난다. 한국화의 물감, 커피, 우유 등 농담(濃淡) 및 색깔을 낼 수 있는 재료들을 표현하고자하는 목적에 따라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붙이고, 새기는 방법도 사용한다. 특히 칼로서 양각을 하여 입체감을 드러내고, 음양의 표현이 반대로 나타나게도 한다. 이로서 서예의 영역을 확장한다. 한편으로는 서예의 영역이 어디까지냐,는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하여야 하는 가도 현대의 서예의 과제이다.”(전명옥. 현대서예에 나타난 서화 동체성에 대한 연구. 조선대 석사논문. 1997)
전명옥이 지적하였듯이 현대서예가 아직 개념 정의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현대서예의 기점을 어디에 잡아야 할 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반적인 정의에서 본다면, 광복 이후에 명칭을 ‘서도’에서 ‘서예’로 바꾸고, 서예에 조형미를 강조한 손재형부터 살펴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도라면서 붓글씨 즉, 습자 내지 필사의 기능으로 인식하였다. 잘 쓰는 글씨를 추구함으로 공교(工巧)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서도에서 서예로 바꾼 것은 예술의 개념으로 전환한 것이다. 서화동원(書畵同原) 운동을 펼치면서 글씨를 문자의 조형적 측면으로 접근하였다. 문자가 가진 의미의 전달보다는 조형미를 통한 추상성을 예술적으로 발전시켜 이미지 전달을 하고자 하였다.
그는 작품을 만들면서 한문의 특정 서체에 머물지 않고 오체를 한 글자에 섞어서 쓰므로 조형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서체는 법첩보다는 조형성을 강조하였다. 이런 이유로 전통주의자로부터 많은 공격을 보았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손재형의 작품은 문자의 범주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조형미도 글자의 형태에 머물고 있을 뿐이지 아직까지 회화로 뻗어가지는 못 하였다.
유희강은 손재형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의 초기 작품에는 문자와 회화를 한 면에 표현하였다. 혼합이라기 보다는 독립된 문자와 그림(선화 양식의)을 한 지면에 나타내었다. 유희강은 오른손이 자유롭지 못한 말년에 이르러서 회화성을 도입한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유희강은 중국에서 정식으로 회화 공부를 한 경력도 있으므로 회화성을 도입한 작품에는 손재형보다 일보 전진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73년(계축년)에 집중적으로 작업한 계축묵희는 서예라기 보다는 수묵화에 가깝다. 유희강이 비록 회화적 표현이라고 하였더라도 용필이나, 먹의 사용 등에서 서예의 특성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재료적인 면에서 전명옥이 말한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계축묵희 이후의 작품에는 마치 아동화 같고, 동화책 속의 삽화같다. 유희적 치기가 넘쳐났다. 더 나아가서 선사시대의 암각화와 서예를 접목하는 작품도 남겼다. 한문은 고대문자일수록 상형성이 강함으로 문자에 회화성을 도입하기에 용이하다. 회화성을 도입하려는 작가들은 지금도 고대 문자를 더 선호한다. 한문 서예의 일필성은 생동감을 주므로 감정이나 작가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유희강은 한문 서예가 갖는 특성을 최대한 이용하였고, 지, 필, 묵이라는 재료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김태정은 비교적 나이가 들어서 서예를 시작하였다. 김태정만이 아니고, 이 세대들은 거의가 어릴 때부터 한자를 익힌 것이 아니고 성년이 된 후에 취미로 서예를 시작 하였으나 서예에 매료되어 빠져들었으므로 무조건 전통 서예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었다.
초대작가가 된 후에서야 미국과 대만으로 유학을 가서 서양회화도 공부하였다. 대만에서는 중국의 전통 미술에 개혁을 이끈 오창석의 제자를 만나 문인화를 배우므로 변화에 대하여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1987년에 현대미술관의 초대작가 전시회에 ‘자연회귀’를 출품하였다. 이후에 자연회귀 시리즈를 발표하였다. 먹으로 칠하여 색면을 만든 후에 고문자를 마치 기호나 약호처럼 필선으로 표현하였다. 서예의 법첩에 의한 필선이 아니고, 단순히 선의 개념으로 아무런 의미도 담지 않고 형상을 그렸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일부에서는 이 작품을 아예 회화로 분류하였고, 서단에서는 서예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이었다. 반면에 김태정은 자신의 작품에 선을 표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서예로 분류되기를 바랐다.
그 후에 작품의 재료로서 지, 필, 묵 만이 아닌 삼베, 에폭시, 캐패럴, 등의 혼합 재료를 사용함으로 유희강을 뛰어 넘었다. 김태정은 서양회화에서 유행하였던 문자 추상을 도입한듯한 작품도 만들었다. 그 외에도 서양화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든 작품을 만들었다. 전명옥이 말한 개념에서 보면 완전히 장르의 혼합이 일어난 작품을 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현대서예의 개념으로 장르의 혼합을 꼽고 있다.
“서예가 고유의 형식에서 벗어나 흑백에서 색채로, 틀에서 자유분방함으로, 평면에서 입체로, 특수 계층의 문화에서 대중문화로 모습을 바꾸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회화와 설치, 퍼포먼스, 캘리그래피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서예는 자기 고유의 색깔을 잃고 이도 저도 아닌 모습으로 비쳐 질 수도 있으나 이는 더 많은 가능성을 위한 실험이라, 서예에 내재된 힘의 분출을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최희성. 현대서예에서 나타난 해체의 양상 해석 연구. 서울교육대 대학원 석사논문. 2007)
김태정은 최희성이 말한 현대서예의 방법론을 모두 동원하여 작품을 제작하였다. 다만 김태정이 주장한 것은 ‘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예 미술의 기본은 ‘선’임을 의미하는 주장이다. 서예에서 필선을 강조하는 일부의 서예가로부터 냉소까지 받았던 김태정 본인은 ‘선의 미’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은 선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었다고 할 수 있다.
비교적 일찍부터 현대서예론을 펼친 송하경과 김태정은 미협의 서예분과에서 나와서 서협을 주동적으로 만들었다.(1989) 이들의 서예론을 보면 서협의 성격을 짐작하게 해준다. 서예계는 보수적인 미협 서예분과와 진보적인 서협으로 나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협의 운영은 미협의 분과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공모전의 응모 작품도 차이가 없었다. 서협이 태어난 사회적 배경은 진보적인 서예론이 아니었다.
진보적인 젊은 작가들은 이에 실망하여 서협을 뛰쳐나와 현대서예의 기치를 내걸고 새로운 단체를 만들었다. 1991년에 황석봉이 중심이 되어서 한국현대조형서예협회를 결성하였다. 특징이라면 전통 서예의 문자성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문자가 지닌 이미지와 그림의 추상성을 연결하려는 작업을 하였다. 전통 서예를 버리기 보다는 창의성을 극대화하여 현대성을 살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형상성에 너무 집착하다보니 점차 필묵을 버리고 과도한 색채 사용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일회성이고, 일획성인 서예의 본질에서 너무 멀어지게 됨으로 일반의 호응을 얻을 수가 없었다.
황석봉의 실험적인 시도는 좋았으나 아직 걸음마 단계인 현대서예에서 일반인의 시선을 끌기에는 시기상조이었는지도 모른다. 현대조형서예 공모전을 7회(1991-1997)로 단명하였다.
1999년에는 작품에 기(氣)를 강조한 ‘기아트’ 운동을 펼치면서 퍼포먼스도 하였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현대서예는 오히려 퇴조의 기미를 보이는 것에 반성적 재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현대서예가 지향하는 기본적인 방향은 누가 무어라고 하든 회화성의 도입이었다. 그것이 구상인지, 추상인지는 무관할 뿐이었다. 손재형의 조형미 추구가 시발점이라면 유희강의 묵희는 상당히 깊이 빠져들었다고 할 수 있다. 손재형의 제자들인 김기승과 정환섭이 70년 대에 묵희적인 조형 작업을 실험적으로 시도 하였으나 별로 호응을 얻지는 못 하였다. 당시에 이들의 작업을 묵상(墨象)작업이라고 하였다. 다분히 일본의 영향을 보여 준 작업이었다.
한국의 현대서예에 영향을 준 요인으로는 일본과 중국과의 교류를 무시할 수 없다. 일본은 1965년 이후에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일본의 서예가 들어왔고, 중국은 1990년대에 중국의 문호 개방으로 교류가 물밀듯이 일어났다. 특히 중국과 교류는 한국 서예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의 서예는 중국의 고법에 의존하였다. 수 십 년 동안 소통이 차단된 체 한국은 법첩에 매달려서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었다. 1990년 대에 중국과 교류가 일어났을 때는 중국 서예는 엄청나게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중국의 서예를 접한 한국의 서예계는 깜짝 놀랐다. 한국의 현대서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중국 서예가 형성된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사회주의화 된 중국은 서예를 부르주아지 문화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1966년에 문화 대혁명을 시작하면서 서예는 봉건사회의 잔재로 취급하였다. 많은 서예 작품을 소각하였다. 중국에서 전통 서예가 쇠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과는 교류를 하면서 중·일 서예 전람회도 개최하였다. 중국은 전통 서예 대신에 일본의 전위서를 체험하였다. 80년 대로 들어서면서 중국 서예에 다변화가 일어났다. 크게 분류하면 고전적인 서예의 전통은 지지하는 신고전파와, 학원(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학원파 서예운동, 그리고 일본의 전위서와 서구의 미술 이론을 수용한 현대서예가 나타났다.
현대서예라는 말은 1985년에 ‘중·일 현대서법전’이라는 전시회를 열면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중국의 현대서예의 기점을 1985년으로 잡는다. 한편으로는 중국의 현대서예에는 일본의 영향도 많이 나타난다.
학원파 서예는 대학에서 서예과 학생을 지도하는 교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서예 유파이다. 이들은 대체로 문화 혁명의 와중에 청, 소년기를 보냈으므로 청년기까지 전통 서예의 용필법이나 용묵법을 체득하지 못 하였다. 대학에서 서예를 공부하였으므로 고전 서법과도 다르다. 그렇다고 하여 자연발생적인 현대서예와도 다르다. 구성원은 비교적 소수이고, 항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정예 작가들이다. 이들은 해외 교류를 자주 함으로 주변국, 특히 한국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고전 서법을 익히기는 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으므로 전통 서예와는 다르다. 전통 서예와 현대 서예의 중간 쯤에 위치한다. 이들의 작품은 현대 서예와 비교하여 비교적 문자의 형태를 많이 유지하고 있다.
중국의 현대파 서예는 전체적인 경향이 고전의 법도를 반대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서양의 각종의 형식주의 유파의 예술 원리와 일본 전위 서예의 영향을 받았다. 중국이 현대서예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일본의 전위서예는 유럽의 추상화(1950년에 동경에서 유럽의 추상화 전시회가 있었다.)의 영향을 받아서 서예에 추상성을 도입하였다.(이중에 상당수는 서예에 머물지 않고 추상미술로 나아갔다.) 일본의 영향으로 중국도 서예에 추상성을 받아들였다. 작품 경향은 문자를 바탕으로 하여, 추상성을 추구하지만 화려한 색채를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현대서예는 북경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해외 교류를 활발히 함으로 역시 주변국에 영향을 주었다. 한국도 영향을 받았다.
고전 서법을 따르는 신고전파의 경우는 문화 혁명 동안에 지방에서 숨을 죽이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문호를 개방한 시기에 맞추어서 동호인을 만들어서 서예를 즐기고 있지만 아직은 미미하게 유지되고 있다.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한국 서예에 제일 많은 영향을 준 것은 현대서예이었다. 그리고 학원파 서예이었다. 고전 법첩을 고수하고 있던 한국 서예가 해외 교류를 통하여 놀라움과 동시에 받아들인 것은 현대 서예이었다.
손병철은 해외 교류를 통해서 경험한 현대서예를 재빨리 받아 들였다. 일회성의 필묵 정신을 강조하는 서예적 추상을 새로운 이론으로 들고 나왔다. 스스로 물파(物派)로 칭하면서 선의 미를 강조하였다. 그의 논리에는 서세옥의 이론을 받아들인 면이 많이 보인다.
현대서예가 시간 개념으로 필묵의 무한성을 지향하면서 선의 무한성과 찰나성, 공간 양식으로의 획의 일회성과 다양성을 서예의 네 가지 특성으로 보았다. 서예를 작가의 시대 정신과 일치시키는 심물지파(心物之波)로 파악하였다. 찰나성이나 획의 일회성은 작가의 감정을 작품에 나타내는 표현주의 이론을 연상하게 해준다. 그리고 다양성은 작가의 개성을 강조하는 창조력을 생각나게 해주는 이론이었다.
물파 서예는 필묵과 문자에서 출발하지만 텍스트로서 문자에 얽메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문자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파는 문자 기호의 의미보다 조형 언어로서 추상적 형태의 리듬을 지향하려 한다. 물파 서예는 필묵 정신으로 볼 때, 일회적 찰나성에 의해서만 무한한 다양성이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손병철. 한국 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 월간미술4월호. p48.1999)
서예는 기본적으로 선의 조합으로 문자를 만들고, 문자는 의미를 생산해낸다. 물파가 주장하는 서예는 ‘선’을 표현 방법으로 하지만 의미를 지니는 문자 본래의 기능은 해체해버리자는 것이다. 선의 흐름을 통해서 이미지를 표현하자는 것이다. 선을 통하여 추상적인 의미를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전통 서예가 양식과 서법을 존중하여 규격에서 벗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80년 대의 한국 서예를 지배하는 것은 ‘서법파’의 논리이었다. 법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엄격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법고창신에 의하여 개성과 창의성이라는 바늘구멍 같은 틈새만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문자를 해체하고 일회성의 ‘선’만 남기므로 자유롭게 노닌다는 유희성을 강조하였다. 전통 서예에서 주장하는 형식성의 틀은 폐기해버리고 오직 선만 남아 있다.
물파 서예의 근간에는 서세옥이 1950-60년 대에 작업하였던 추상 회화가 있다. 극소의 선과 단색으로 극도의 추상성을 표현하였다. 서세옥은 표현을 최대한으로 절제하면 선으로, 다시 점으로 수렴됨으로 선과 점에서 동양의 정신을 담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점과 선으로 수묵 추상을 표현하였다.
서세옥의 수묵 추상적 회화는 물파의 서예에 영향을 주었다. 1990년 대는 일본, 중국과 교류가 활발히 일어나면서 물파 서예론은 힘을 얻었다. 따라서 1990년 대의 후반에는 선에 의한 수묵 추상의 서예가 유행하였다.
한자를 기본으로 써온 전통 서예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이유는 한자가 우리 생활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한자가 더 이상 일반인들에게 친화적으로 다가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체하여 현대 서예가 나타났다. 대중에게 전통 서예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조형성, 다양한 색채, 그리고 유희성으로 대중친화적인 면모를 나타내려 하였다. 대중친화성은 오늘의 미술이 지니는 공통의 지향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의 추상성을 주장하면서 문자의 본질을 폐기해버린 현대 서예가 대중에게는 한자보다도 더 낯설었을 것이다. 일필에 의한 선의 추상성은 민족의 정서를 감안한 것이 아니고 서구의 추상 미술을 단순히 추종한 것은 아니었는지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면 물파 서예가 오늘에는 벽에 부딪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서예가 시들해지게 하는데 오히려 보탬이 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서예는 문자의 의미에 의하여 뜻을 담고, 내용을 담고, 이야기를 담는다. 문자의 조형미를 추구한다면서 서예가 형상의 미에만 치우친다면 의미 내용이라는 문자의 본질에서 점차 벗어난다. 결국에는 의미는 해체되어 버리고 추상성만 추구하게 된다. 아무리 현대서예를 표방하더라도 내용을 담는다는 문자의 본질을 무시하고는 서예로서 존재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문자의 발생에서 문자는 태생적으로 상형 즉 그림(畵)를 내포한다. 서(書)와 화(畵)는서로 다르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유사성을 지닌다. 서가 의미를 가졌다면 화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런 면에서 그림은 문자를 보충하고, 문자는 그림을 보충할 수 있다. 따라서 회화는 서예를 보충할 필요충분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서예를 밀어내고 서예를 대신하는 위협적인 존재로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자가 회화의 영역으로 수렴되어서 회화의 부수적인 존재로 떨어질 수 있다. 더 나아가서 회화에 완전히 흡수되어버리므로 서예로서 존재마저 말살되어 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드리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서예에서 일회성, 일획성, 필묵 정신, 선의 강조는 이러한 두려움의 발로이다. 실제로 서세옥과 이응노의 경우는 서예가가 아닌 화가로서 선의 미학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상호간의 모자람과 넘침을 조화시키므로 보완적인 효과를 나타내면 서예가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날에 한문의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림으로 보완하는 방법은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김양동은 자신의 서예에 그림을 도입하였다 “전통 서예가 서사라는 조건을 우선시 하면서 미감을 표현하려 한다. 따라서 작가의 개성이나 예술적인 표현을 하기가 어렵다. 한자문화 시대가 아닌 현대에 해석도 안 되는 한자로 지면을 가득 채운 작품이 감상자의 시선을 끌 수가 있을까? 이것이 서예가 외면 받는 가장 큰 이유이다. 새로운 조형 미감으로 대중에게 다가갈 책무가 서예인에게 있다.”라고 하였다. (김정환. 근원 김양동. 필묵의 황홀경.p192. 다운샘. 2007)
김양동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한국 사람이 정서적으로 좋아하는 내용을 작품에 담아야 한다. 선의 미에서 한국의 특질을 찾는다면 토기의 빗살 무뉘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서예가 선에서 조형미를 추구하려면 중국의 법첩에서가 아니고 한국적인 선에서 전형을 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김양동의 작품은 옹기를 굽는 흙으로 빚은 도판에 전각이나, 고서의 한지를 덮어서 요철이 생기도록 한 후에 튀어 나온 부분에 채색하여 회화적 형상과 글씨의 멋을 나타내었다. 한글과 형상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대중에게 친근감을 주므로 대중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의작품에서 재료는 지필묵이 아닌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였다. 표현 기법도 서예의 전통 기법이 아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문자 표현이 중심이고, 색채도 연하고 부드러운 (김양동은 황토색을 좋아 하였다.) 색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문자에서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니었다.
또 하나의 작품 경향이라면 전각과 글씨, 그림의 조화를 통하여 작품 제작을 함으로 감상자의 감성에 호소하는 방법을 이용하였다. 이것은 대중친화적인 기법이고, 대중성 확보를 위한 실험이기도 하였다.
전통 서예가 문자적 이해를 요구하는 이성적 접근이라면 김양동은 회화적 방법에 의한 감성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김양동은 대학에 재직하면서 후학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현대 서예에서 김양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이유이다.
물파가 서의 본질인 선을 강조하여 추상성을 추구하였다면 김양동은 서와 화를 혼합함으로 서예 영역의 확대를 꾀하면서 구상성으로 나아갔다. 색채 사용도 자극적인 원색을 피하고 연한 색을 사용하였다.
현대서예는 한국화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화의 궤적을 따라가 봄으로 현대서예의 전망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 대의 한국화는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였다. 70년 대의 후반과 80년 대에 걸쳐서 나타난 현상은 전통의 고수와 실험성이 짙은 회화 운동이었다. 진경산수로 복귀하는 한편, 다른 한 쪽에서는 수묵화 운동이 일어났다. 채색을 강하게 사용하는 사실주의 운동도 있었다.
수묵을 극대화 시킨 한국화가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단색조의 수묵화야말로 한국인의 미의식과 정신세계를 잘 반영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수묵화는 현대적 조형성만 너무 강조함으로 너무 시각적이고, 구성적이다. 이로서 한국 고유의 정서와 정신을 표현하는데 실패하였다는 평을 듣는다. 너무 흔한 수묵의 범람은 수묵화 특유의 격조와 정서를 잃어가면서 퇴조의 길을 걸어갔다.
채색화는 일본의 잔재라 하여 광복 이후에 냉대를 받았다. 극히 일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70년 대 후반부터 젊은 작가를 중심으로 다시 유행하였다. 70년 대에 조명을 받은 민화의 영향도 있었으리라고 한다. 박생광이 대표적 화가이다. 채색화가 일본의 영향을 나타내었다면, 한국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채색화이었다. 그러나 한국화의 재료로서 서양화적인 방법을 적용한 그림이 너무 도식적으로 흐른다는 비판을 받았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치루면서 국제화, 세계화, 보편화가 우리의 의식에 자리 잡는다. 1990년 대에 접어들면서 수묵과 채색의 혼용, 구상과 추상의 병용 현상이 나타났다. 구성주의적 화면을 통하여 중층의 이미지를 표현하였다. 재료적인 면에서도 지필묵이라는 전통적인 재료를 벗어나서 폭 넓은 선택을 하였다. 화선지 이외의 다양한 종이를 사용하였다. 먹도 강도가 다양한 상품화된 먹즙을 사용하였다. 채색 물감도 젯소나 아크릴릭 물감, 크레파스까지, 온갖 물감을 재료로 사용하였다.
심지가 긴 모필을 사용하던 전통에서 평필(平筆)이나 편필(偏筆)을 사용하였다.
현대서예라는 필묵 운동도 한국화의 실험적인 방법에 영향을 받는다. 특히 수묵 운동은 붓과 먹의 사용이라는 동질성 때문에 수용하기 쉬웠다. 80년 대 이후 90년 대에 걸쳐서 나타난 현대서예는 거의가 수묵에 의한 조형미 구축이었다. 서예에 채색이 등장하는 것도 이때이다. 물파가 오로지 ‘선’에서 서예미를 탐색하였다면 현대조형서예협회의 경우에는 먹의 번짐을 적용한 선의 구축, 채색의 사용 등 다양한 실험을 하였다.
실험적인 서예 운동은 서예가 갖는 문자의 의미를 해체해버린 작업이었다. 실험 서예가 전통적인 서예로서 생명을 지키기에는 본질적으로 어려웠다. 한국화에서 수묵 운동의 퇴조가 나타나자 문자를 해체하는 수묵과 채색, 선에 머물렀던 현대서예도 시들해졌다. 이 시대에 현대서예를 천착하였던 작가의 작품 경향을 보면 한국화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황석봉은 이미 살펴 보았다.
전도진은 서예와 전각에서 자신이 개발한 새로운 기법으로 작업을 하였다. 시멘트나 석고에 갑골문이나 금문을 암각화의 기법으로 파낸 후에 다시 한지에 탁본을 하는 방법으로 작품 제작을 하였다. 먹과 종이, 그리고 문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작품 제작의 방법에 변화를 꾀하였다.
김순욱은 전통 서예의 작품에 덧칠을 하듯이 글자를 씀으로 미국에서 시선을 끌었다. 그가 이런 시도를 한 배경에는 전통 서예는 미국의 화랑에서 외면을 당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유재학은 공모전은 아예 외면하고 서예, 회화, 서각, 전각, 판화 등에 걸쳐서 장르의 구분을 없앤 작품 제작을 하였다.
여태명은 한문 대신에 한글을 이용하였고, 법첩을 파기하고 서민들이 사용하는 글자체로 쓴 글씨룰 민서라면서 작품을 만들었다.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작업하였다. 도자기에도 쓰고, 회화와 혼합하여 표현하였다.
노상동은 선의 미를 추구하여 일획성을 강조함으로 비교적 서예의 영역에 머물려고 노력하였다.
석용진은 회화의 현대적 표현과 서예를 혼합하여 대중에 다가가는 작업을 하였다. 아트 패어에도 출품하여 대중친화적인 작품을 만들어 시장성 확보를 위해서 노력하였다.
전종주도 작품에 회화성 도입을 주장하고 있지만 비교적 서예의 특성까지는 버리지 않는 작품을 만들었다.
90년 대까지 현대서예를 작업한 대표적 작가들을 일별해 보았다. 그들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면서 작업하고 있는 실험 서예들이 2000년에 접어들면서 오히려 낙조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들의 작품 성향은 어디까지나 실험 작품이므로, 발전적인 의미로 그 이유를 따져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서예가 대중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방편으로 퍼포먼스를 행하였다. 수많은 대중 앞에서 연극을 하듯이 글쓰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형식이다. 며칠에 걸쳐서 대중이 모여드는 백화점 앞에서 벌린 이홍재의 퍼포먼스가 대표적이다.
퍼포먼스는 행위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 행위가 끝나면 결과물로 남아 있은 것은 없다. 의미 자체인 행위는 과거의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사진이나 영상물로서 그 흔적 만이 역사 속에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서예의 퍼포먼스는 결과물로서 서예 작품이 남는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퍼포먼스에는 일반적으로 격렬한 감정의 표현이 있다. 서예의 일회성과 일획성에 결합하여 작품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격렬한 감정의 표현이 서예가 갖고 있는 본질에 얼마나 충실할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대학에 서예과를 설치한 것은 현대 서예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젊은 작가들이 실험적인 작업을 많이 수행하기 때문이다. 오늘에는 대학에 들어오는 젊은이들은 예전처럼 어릴 때부터 한문을 익히지 않는다. 대학에 와서 서예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들은 현대 서예에 쉽게 빠져든다. 여러 면에서 중국의 학원파와 유사한 배경을 가진다.
1989년에 원광대를 필두로 계명대, 대구예술대, 대전대, 호남대, 경기대에 서예과가 개설되면서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서예과 출 신의 작가들이래야 45세를 넘지 않는 젊은 청년들이다. 이들의 활동이 서예계에 영향을 주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렇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작품 경향이 미래의 한국 서예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틀림없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을 주목하면 미래의 한국 서예를 가늠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90년 대와 2000년 이후의 작품 활동은 4-50대(당시에)가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중국의 현대서예를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을 서예과 출신 작가와 비교하면 한 세대 쯤 앞선 연령군들이다.
2009년 4월에는 각 대학의 서예과의 졸업생들이 모여서 서예과 창설 20주년을 기념하여 전시회를 가졌다. 전시회의 명칭을 ‘대학파 전시회’라고 하였다. 중국에서 대학 중심의 서예 유파를 ‘학원파’라는데 연유하여 이름을 붙였다. 취지문에서 기존의 한국 서단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을 탈피하기 위한 모색을 하는 뜻에서 기성의 서단과는 차이를 둔다고 하였다.
작품의 경향으로는 다양한 양식을 도입하고, 장르의 혼합을 시도하였다. 서예와 전각 또는 서예와 문인화를 혼합합으로 기존의 장르를 넘어서려고 하였다. 전통서예가 문방사우를 재료로 상용한데 비하여 채색 물감을 사용하였다. 화선지이 흰 색 대신에 채색된 종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다양한 장법을 구사함으로 의식적으로 전통 서예의 법첩을 무시하였다. 각(刻)을 도입함으로 서예를 넘어서서 어느 장르에도 소속시키지 않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영어를 붓으로 써서 모나리자 형상을 재현해내기도 하였다.
대학파 전시회에서 또 하나의 특징을 들라면 한글의 차지하는 비중이 무거워진 것이다. 취지문에서는 대중친화적인 작품을 제작함으로 미술시장에 진출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하였다. 대학파의 작품 경향이 한국 서예계에 어떤 형태로 자리를 잡을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대학파 전시회는 한국 서예에서 새로운 모험이고 새로운 시도라고 평하였다.(김영희. 대학파 전의 해설에서)
앞 선 세대와 굳이 차이를 둔다면 90년 대의 작품이 선의 미를 주장하면서 서예의 범주 안에 머물기에 집착하였다면, 서예의 장르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한 점이다. 각을 서예에 받아들인 것이 하나의 예증이 될 수 있다. 지난 세대가 재료적인 측면에서 문방사우를 벗어나지 않으려 하였다면, 재료를 개방하였다는 것도 차이라면 차이이다. 앞으로 이들이 어떤 길을 걸을지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앞으로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대학파 전시회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 “다양한 문화와 예술의 만남을 통한 열린 세계를 향하기 전에 대학파는 먼저 서예가 담아내야 할 바람직한 내용과 서예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먼저 있어야 한다.”라는 질책성 언급을 하기도 하였다.(조민환. 대학파와 新尙象의 서예문화 탐색. 서예비평4.p8. 2010) 사회적인 분위기에 휩쓸려서 너무 가볍게 접근한다는 따끔한 충고일 것이다.
한국의 현대 서예 흐름을 요약하여 살펴보면 현대 서예는 여러 요인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 전통 서예를 고수하려는 노력도 있는 반면에, 한국화의 변화를 눈여겨 보면서 추종하는 경향도 강하게 보인다. 일본이나 중국의 현대 서예의 영향도 보인다. 서구 회화의 추상성의 영향도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흐름을 대강이나마 훑어본 바로는 아직 제자리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서예를 서예 미학이나, 서예의 본질에서 접근하기에는 현대 서예가 나아가는 방향에 한계를 느낀다는 생각이다. 한국 정서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한국화가 사석원은 재료적인 면에서는 서양회화에 사용하는 과슈나 아크릴 등도 받아들여 강력한 채색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한국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 이로서 한국화의 영역에 머물 근거를 마련하면서 시장성도 확보하였다. 서예도 사석원의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 서예계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대중사회 속으로 들어가지 못 하고 있다. 한국 서단이 빈곤과 어려움에 허덕이는 이유도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서단이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도 사회와 긴밀하게 연계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작품의 상품화는 속(俗)이라고 비난하기 보다는 오히려 진작하여야 할 것이다. 일반 대중에게 수용되지 못하는 작품이라고 하여, 대중의 무지를 비난한다고 하여 예술성이 높은 것도 아니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작품이라고 하여 예술성이 떨어지는 속된 작품이라고 폄하할 수도 없다. 팔리는 작품으로 가난을 벗어나서, 작품 생활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다면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예 작가들이 빈곤과 어려움에 처한 것이 현실이라면, 탈피하는 것도 작가 스스로의 몫이다. 지나치게 상업주의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할 필요는 있지만, 굳이 피해야 할 까닭은 없을 것이다. 서예의 고고함을 주장하면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터져 나오는 공모전의 비리는 오히려 사회인들의 비웃음만 사고 있다. 그렇더래도 공모전에 의존하는 전통 서예는 여전히 서예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째거나 한국의 현대서예가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체 아직까지 오리무중에서 헤메고 있다. 그러나 2005년을 넘어가면서 극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서예에 다양한 실험을 하는 작가들이 있다. 사석원처럼 한국의 정서에 호소하는 작품을 제작하는 서예가도 있다. 앞으로는 이들의 행보와 관람자의 반응이 하나의 잣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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