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는 복고시대 였고 문예사상이 비교적 활기를 띤 시대였다. 서예 상에서 말한다면, 조정의 여러 황제들이 모두 서예를 좋아하였는데, 그중 成祖 朱棣는 일찍이 "이부가 선비 중에서 선발한 능서자를 지도하고, 한림에 예치한 녹미와 녹봉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 능력을 진작케 하였다.1) "고 한다. 때문에 일시에 명대 문인들이 서로 다투며 서예를 연습하였다고 한다.
동시에 明代는 또 帖學이 대성한 시대여서 刻帖이 기풍을 이루었으나, 반복으로 번각하여 이미 원작은 참 모습을 잃었다. 명대부터 처음 정연하고 판에 박은 듯 한 것이 출현하여, 모든 글자가 매우 같은 "臺閣體2)"가 되었다. 이런 기풍이 크게 성행할 때 일부 사람들은 확실히 "俗書", "奴書"가 되었다. 그런데 지식이 있는 선비는 스스로 혜안이 있어, 결코 물결치는 대로 표류하지 않고, 이 시기를 대표하는 초서를 썼다.
명대 초기 비교적 저명한 장초서가는 宋克과 兪和이다.
宋克, 字는 仲溫이고 호는 南宮生이며, 江蘇 蘇州 사람이다.『明史』에서 그는 "두문불출하면서 글을 썼는데, 하루에 천장을 소비하였다.3)"고 기재하였다. 게다가 말 타고 검술을 배우기 좋아하였고, 병서를 연습하여 문무가 겸비된 인물이었다. 그의 장초는〈急就章〉을 배웠으나, 조맹부의 울타리를 벗어났으며, 자신이 帖學에 대한 이해로써 준수한 새로운 경지를 만들었다. 그가 임서한〈急就章〉은 매우 많이 意臨한 곳이 있다. 비록〈急就章〉임서는 宋克 이전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변화의 경험을 하였으나, 宋克 의〈急就章〉은 바로 변화가 비교적 컸으며, 그가 이해한 점을 서사하였다. 이와 같은 변화의 풍격을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장초〈錄孫過庭書譜帖〉이며, 그중 풍격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그가 장초와 해서를 교묘하게 융합하여 일체를 이룬 것이다. 뛰어난 것은 해서에서 초서로 넘나든 변화의 흔적을 남기지 않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비록 장초라고 느끼게 하였으나 해서의 의취가 있다. 비록 해서를 뒤섞였으나, 오히려 초서의 정취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시각 상에서 결코 서로 모순 되지 않았다. 이 작품 중에서 그가 이런 서체에 대한 혁신을 볼 수 있다. 그는 趙孟頫 심지어 장초 전통의 부드럽고 자연스런 고박함과는 달리, 굳세고 힘 있으며, 준수한 것으로써 기조가 되었고, 선조는 굳세고 강하며 힘 있게 썼다. 전체적으로 보면, 楷法으로써 草字를 머금고 있고, 方扁形의 장초 자형을 長方形으로 써서 사람들로 하여금 면모가 일신된 것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변혁은 매우 많이 심미정취를 풍부하게 해줘 초서를 배우는 사람에게 매우 많은 깨우침을 준다. 明淸 시기 초서를 배우는 자는 그의 영향을 받았다.
明初 장초에 능한 자 역시 兪和가 있는데, 풍문은 그가 趙孟頫의 사생아 이며, 어려서부터 趙孟頫에게 서예를 배워 장초를 쓰면 趙孟頫와 거의 혼동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明代 진정으로 초서가 최고조로 솟구쳐 오르게 한 사람은 역시 祝允明, 文徵明, 董其昌 등이다.
祝允明, 字는 希哲이고 호는 枝山이며 長洲 사람이다. 5세 때 직경이 한척인 큰 글자를 써서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됨은 성격이 호쾌하고 시원스러우며 구속되지 않았다.『藝苑卮言』에서 "초서학습은 大令(王獻之)·永師(지영),海南(?). 狂素(회소), 顚張(장욱) , 北海(李邕) ,眉山(소식), 豫章(황정견), 襄陽(미불)을 배웠고, 임서는 절묘하였으며, 만년에 변화무쌍하였고, 웅건하고 힘 있는 풍격은 꾸밈새가 없어 천진난만하고 자유분방하다.4)"고 언급하였다. 文徵明, 董其昌과 비교하면, 祝允明은 전문서예가이며, 일생동안 오직 서예만 몰두하였다. 행초서 중에서 그가 임서도 연구도 하지 않은 고대명가는 없었다. 그의 행초서는 大草가 가장 저명하며, 張旭과 懷素를 계승하였으나 결코 장욱·회소와 같이 제멋대로 하지 않고 천진난만한 격조로써 서사하였기 때문에 그의 광초는 특별히 당시에 중요시하게 되었다.
세상에 전해지는 祝允明의 小草〈永貞行〉은 자형이 기울고 기이하며, 선조는 굳세고 강하며 변화 다양하다. 그러나 광초〈洛神賦〉·〈箜篌引〉·〈落花詩〉은 오히려 張旭·懷素·黃庭堅에 대한 흡수와 소화를 볼 수 있다. 자형의 처리는 무작위로 변화하였고, 용필은 침착하고 융통성이 있으며, 전체적으로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척척 써 내려갔고,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느낌이다. 행간 침투는 이미 의식적인 추구를 달성하여 전체적으로 결구 전체를 형성하였다. 당연히 이런 관념은 역시 성숙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일부분의 처리는 흔히 타당치 않은 곳이 있으나, 이런 타당치 않은 곳도 그의 기개에 의해 매우 많이 덮어 씌워졌다.
文徵明, 이름은 璧이고 字는 徵明이다. 이후 字는 行으로 하였고, 다시 字를 徵仲으로 고쳤으며, 長洲 사람이다. 서화에 능통한 인사였으며, 게다가 장수한 서예가였고, 90세 때 여전히 자그마한 小楷를 쓸 수 있었으며, 楷行으로 유명하였다. 소초는 二王에게 득의하여 전아하고 뛰어나게 아름다우나 변화는 크지 않다. 그런대로 이런 풍격은 명대 첩학이 흥행할 때 매우 환영을 받았다.
그의 광초는 전적으로 黃庭堅을 모방하였다. 예를 들면〈七言律詩四首〉의 字形과 筆法이 黃庭堅의〈李白憶舊游詩〉와 매우 비슷하며, 그의 초서 중에서는 가작이나, 황정견의 의취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文徵明·祝允明과 동시대의 초서가 중 李東陽과 王寵이 비교적 훌륭하다. 이동양은 회소를 배워 용필이 유창하고, 왕총은 魏晉을 배워 전아하고 표일하게 서사하였다.
축윤명과 문징명 이후 서단에서 가장 영향이 있는 인물은 동기창이다. 그의 출현은 명대 첩학을 절정에 이르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董其昌, 字는 玄宰이고 호는 思白·思翁·香光이며, 松江 사람이다. 그는 재기가 뛰어나 어려서부터 이름이 났으며, 회화와 서화 이론상에서 모두 매우 큰 성취가 있었는데, 바로 유전되는『畵禪師隨筆』이다. 그는 왕왕 선종사상으로써 서예의 이치를 깨달았으며, 米芾과 趙孟頫에 대해 매우 우러러 탄복하였는데, 특히 행초서는 미불로서 학습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광초는 회소에게 득의하였으며, 이후 자기 자신이 서예에 대한 체득을 결합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광초는〈跋羅漢初祖贊〉으로써 대표한다. 비록 회소와 한 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나, 그 묵색은 연하며, 자형이 뛰어나게 아름답고, 使轉이 가볍고 부드러우며 정취가 그윽하다. 사람들에게 가뿐하고 자유자재한 미감을 준다.
동기창은 그의 학생과 康熙皇帝가 그를 안하무인격인 정도로 치켜 올렸고, 그의 서작중의 뛰어나게 아름답고 전아함은 후인에 의해 속된 상태로 강조하였다. 이것은 당연히 그와 무관하나, 이런 풍조는 明末에 역시 매우 큰 영향이었다. 그러나 명말 초서는 초서발전사에서 전면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며, 초서의 각종표현 방법은 명말에 모두 성숙한 상태에 도달하여 누구도 천하를 통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기창의 동시대 혹은 조금 늦은 시기에 풍격양식은 계속되어 徐渭·陳淳·張瑞圖·黃道周·倪元路·歸莊·屠隆 및 명말 청초의 초서대가 王鐸·傅山과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초서를 절정에 이르게 하였다. 초서 중 이런 이면에 비교적 개성 있는 대표인물은 徐渭·王鐸·傅山이다.
徐渭, 字는 文淸이었으나 文長으로 바꾸었고, 호는 天池山人·靑藤道人이며 紹興 사람이다.
徐渭는 서예가·서예이론가인 동시에 시인·희곡가·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일찍이 병서를 대량 열독하여 군사에 관한 일에 능숙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회화·시문·희곡 영역에서 모두 탁월한 성취가 있다.『四聲猿』이 바로 그가 쓴것이다. 그는 일찍이 여덟 번이나 松州에 가서 鄕試에 참가하여 "열살에 수재시험에 합격하였다.5)"고 한다. 이러한 신분의 "글재주로써 향리에서 유명하였다.6)"고한 그가 여덟 번이나 모두 불합격하였다. 그는 일찍이 浙閩의 總督 胡宗憲에의해 눈에 들어 왜국에 항전하는 군사행동을 계획하였으나, 총독은 도리어 이 일 때문에 하옥되었고, 후에 서위 역시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의 벼슬길은 매우 순탄치 않았고, 문무가 겸비된 인재였으나 등용되지 못하였다. 그는 "瘋狂 미쳤다"고 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일찍이 자살하려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생활이 곤궁하여 실의에 빠지고 의기소침하였으며, 사방을 빈둥거리며 유랑하였다. 만년에 또 병약하여 단지 서화에 의지하고 살았으며, 73세에 불우한 인생을 마쳤다.
서위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으로 중국예술계에서도 드물다. 시대가 그를 사회 불평에 대한 광분을 예술에 융합하도록 조성하였다. 이것은 한림원에 소속되어 조정에 조아리는 관리들에게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예술경지이다. 이러한 광분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그의 광초 기세인데, 마치 顚張·醉素를 압도한 듯하다.
그의 초서와 서론에서 조년에 그가 시작한 매우 깊은 전통수완을 볼 수 있는데, 이점이 지극히 중요하다. 바로 이와 같기 때문에 그는 초서 영역에서의 타고난 재능이 충분히 발휘되었다. 그러나 50세 이후에는 자신으로서 전통을 통솔하였다. 그는 이런 분방한 필세로써 그의 제멋대로 한 정서에 기탁하였으며, 그는 용필 중에서의 二王·懷素·蘇軾·米芾 등 수많은 수법 모두 이미 소화되어 그 자신의 몸이 되었고, 그의 절주와 구도는 오히려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오직 이 한 사람만이 당시 사람들에 의해 "野狐禪7)"으로 칭하게 되었다.
만약 완고하게 그의 광초 특징을 찾는다면,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인 장법 상에서 말한다면, 그는 행위 관념을 타파하여 "포치는 균등해야하나 반드시 균등할 필요가 없다.8)"고 하는 난잡한 구도로써 전체 장법의 균등과 평형을 구하였다.
필법 상에서 말한다면, 그는 絞裏·虛實·露藏·粗細·方圓 등을 전체에 융합하여 마음대로 하였다.
결구 상에서 보면, 字勢는 기울기도하고 방정하기도하며, 임기응변적으로 조응하였다. 그렇지만 기색을 표현하는 가운데, 마음대로 안배하였다.
절주 상에서 보면 그는 疾徐를 전체에 융합하여 큰 폭으로 상승 또는 하락하였으며, 역량의 운동 상에서 보면, 輕重이 교체되었고,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정황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하였다.
때문에 袁宏은 그가 "서예를 논하지 않고 서신을 논하였다.9)"고 말한 것은 서예가 중의 "散聖"이요 "俠客10)"이며, 조금도 요염한 기색이 없다. 그의 영향은 깊고 컸으나, 결코 명대에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王鐸, 字는 覺斯이고 호는 嵩樵이며, 河南 孟律 사람이다. 그는 明淸 교체시기에 생활하였으며, 明朝에서 그는 禮部尙書와 東閣大學士를 지냈다. 淸이 들어선 이후, 그는 두 임금을 섬기는 신하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생활과 사상은 모순과 불행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는 창조성을 지닌 초서가로서 고전 초서를 집대성한 인물이다. 그의 초서는 晉唐을 종법으로 하였다. 때문에 "나는 유독 二王을 본받았다.11)"고 스스로 말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그가 張旭과 懷素를 배웠다고 하였는데, 그는 인정하지 않았으며, 二王을 종법으로 삼은 정도 상에서 서예를 40년 동안 배운 부지런한 노력의 자취를 피력하였다. 게다가 "하루는 임서하고 하루는 탐색을 청하는 것으로써 번갈아 종신토록 바꾸지 않았다.12)"고 말하였다. 이왕을 대량으로 임서한 작품에서 그의 말이 사실과 일치함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王鐸의 미학 사상은 모순 되게 고인을 임서한 양식상에서 때때로 창신의 의식을 드러냈다. 그가 임서한〈豹奴帖〉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장초를 連綿 大草로 임서하였고, 문자의 내용 이외에 그 서법의 의미도 그에 의해 대부분 변동되었다.
그의 초서가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은 그가 고대 초서의 개념을 고전의 정상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명대의 초서는 중국고전초서를 집대성한 시기로써 초서의 실천을 막론하고, 초서이론 역시 모두 미증유의 높이에 도달하였다. 복고와 계승의 각도에서 보면, 趙孟頫로부터 董其昌에 이르는 몇 백 년의 노력으로 고전 초서기법은 전면적인 계통의 발전을 얻는 결과를 낳은 동시에, 이런 기법은 이미 明 일대의 시풍에 깊게 융합되었다. 창신의 각도 상에서 보면, 楊維楨에서 徐渭에 이르기까지 이미 초서 창신의 관념을 명대 식견 있는 초서 서예가의 두뇌에 낙인 되었다. 明代에 성과 있는 초서 서예가는 매우 많이 고전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다른 길을 개척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王鐸은 고전과 창신이 교묘하게 결합한 서예가였다. 그는 이미 고상하고 엄격한 고전기법을 갖추고 있었고, 또 명말 초서계는 특유의 강렬한 낭만정신이 있었다. 이 두 측면은 그가 특수한 생활환경과 심미관의 제약 하에서 융합한 것이다. 그의 용필과 용묵 상에서 보면, 그는 모든 초서의 묵법을 다하였다. 濃墨에서 淡墨까지, 漲墨에서 渴墨까지, 그의 초서 중에서는 이러한 묵색의 운용이 모두 자유자재하다. 그의 용필도 변화 다양하게 方圓·正側·典雅·剛한하고, 펴고 합치며, 가르고 모아 뭐든지 할 수 있는 듯하다. 게다가 그는 매우 강한 필묵공제 능력으로써 이러한 필묵용법을 용광로에 융합하였고, 자연스럽지 않게 조작한 느낌은 전혀 없다.
結構 측면에서 그는 도리에 맞지 않거나, 위치가 겹치지 않도록 비켜 놓았다. 그는 매우 민감한 구도의식이 있다. 자형은 방정하고 둥글며, 자태는 기울기도 하고 바르기도 하며 뒤섞이어 가지런하지 못하며, 행선은 출렁거리고 들쑥날쑥하며, 그리고 字內·字間·行間의 흑백처리 등은 완전히 최고봉의 경지에 이르렀다. 매우 많은 곳은 甲骨·金文 구도의 효과와 우연히 일치하며, 초서 구도를 절정에 이르게 하였다.
傅山, 어려서 이름은 鼎臣이고 字는 靑主이며, 호는 石道人이고 山西 曲陽 사람이다.
그는 왕탁과 동시대 사람이었으며, 게다가 모두 明에서 淸으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부산은 淸에 들어온 후 오히려 청의 관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제관을 착용하고 道觀年 즈음에 의사로서 생활하였다.
傅山은 서예이론 상에서 "차라리 졸박 할지언정 기묘하지 말며, 차라리 추할지언정 요염하지 말며, 차라리 통일성이 없을지언정 가볍고 매끄럽지 말며, 차라리 거리낌 없이 시원할지언정 안배하지 말라!13)"고한 네 가지 모순대립된 면을 제기하였고,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선택표준을 제기하였다. 그의 광초는 바로 이러한 이론을 체현하였다. 그는 솔직하고 꾸밈이 없고 서투르고 방종한 수법으로써 품고 있던 생각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었고, 기세가 웅대하고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그가 결코 점획을 중시하지 않은 것은 정확하고 적당한 것인지! 구도는 자세하고 확실한 것인지! 그러나 충만히 내재된 미감으로써 사람마음을 뒤흔든다. 그는 추한 것으로써 대단한 아름다움을 표현하였으며, 큰 기교는 졸박함과 같은 관념화로써 자기 자신의 표현방법이 되었다. 둘둘 휘감은 용 같이 호방한 선조로 휘감아 내려간 기운 중에 사람으로 하여금 남성적인 힘의 웅장한 모습을 체득케 한다.
부산과 비교적 비슷한 朱탑(답)이 있는데, 바로 八大山人이다. 그는 명 왕실의 후예였으며, 청에 들어온 후 수년을 벙어리 인체하였고, 후에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그의 용필은 말끔하고 강하며 둥글고 질박하다. 고결하고 구속되지 않은 정신을 지니고 있어, 역시 明末 淸初 비교적 개성이 있는 서예가이다.
淸代는 碑學이 크게 일어났다. 때문에 비교적 영향이 있는 서예가는 다수가 碑를 배우는 것으로써 위주가 되었으며, 帖學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어느 정도 상에서 말한다면 초서의 발전에 일정한 제한을 받았다. 때문에 淸代 성취가 있는 서예가는 매우 적다. 그러나 碑學의 흥기는 전체 서예계에 매우 많은 생명력을 가져왔고, 비학의 예술 관념과 창작성취도 후기의 초서를 배우는 자에게 매우 많은 시사를 주었으며, 특히 초서의 선조에 대해 매우 깊은 이해가 있었다. 청대 趙之謙 등의 행초서는 明末과 다른 노선을 걸었고, 비학과 첩학의 융합 상에서 약간의 실험이 있었다. 그런데 진정으로 의식 있게 비학의 정신과 첩학의 정취를 서로 결합한 서예가는 바로 청말 沈曾植이다. 그의 출현은 청말 서단에 아주 새로운 정신을 가져오게 하였다.
沈曾植(1850-1922), 字는 子培이고 호는 乙암이며, 뒷날 호는 寐叟로 썼다. 浙江 吳興 사람이며,『淸史稿』에 전기가 있다. 그는 박식한 인사로서 經史와 地理의 학문에 대해 매우 깊은 조예가 있었다. 王國維 등의 학자·서예가와 매우 긴밀하게 왕래하였다. 중년 이후 정치사상의 원인으로 인하여 그를 서예에 몰두하게 하였다. 청말 특수한 역사 환경 중에 그의 초서는 자유분방하여 이채롭다. 그는 첩학에 손을 대었으며, 일찍이 歐陽詢·黃庭堅·米芾 등 제가를 연구하였고, 만년에 스스로 黃道周·倪元路 두 사람의 필법으로써 법을 변화시켰으며, 分隸를 참고하였고, 碑帖을 융합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초서는 장초로써 유명하였는데, 그 용필은 方圓이 겸수되었고 고아하며 힘이 있으나, 趙孟頫·宋克 등의 아름다운 자태의 느낌은 없다. 그는 碑派가 제창한 바의 금석 기백과 비파의 아취를 자신의 장초에 교묘히 융합하였기 때문에 그의 장초는 아주 새로운 면모를 나타내었다. 자형 상에서 그는 趙孟頫와 宋克 등의 글자마다 독립되고 대소차이가 크지 않으며, 方正이 위주가 된 짜임새와 격식을 타파하였다. 方扁과 斜正을 병용한 방법으로써 형태를 서사한 것이 변화무쌍하고, 불균형 중에 그 밖의 균형을 찾았다. 淸 曾熙曾은 그의 서예를 "훌륭한 사람이 처해 있는 곳은 평온하지 않다.14)"고 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초서의 묘한 점이다. 이런 사법은 當代 장초 서예가에게 깨우쳐 주었고, 그의 학생인 當代 장초 명가 王蘧常은 이런 기초 상에서 계승 발양하여 독자적인 경지의 장초 풍모를 서사하였다. 그 밖에 청대 화가의 題畵 초서는 매우 많은데, 상당히 독특하게 서사하였다. 그들은 초서의 발달에 대해 모두 상당한 영향을 일으켰다. 근대에 이르러 초서는 于右任과 林散之 등에 의해 아주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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