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서예
-한국서예의 원형을 찾아서-
한국의 고대서예
고대 한국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그렇다보니 문화와 학술등에 있어서 중국과 교류를 한다기보다 중국의 것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상황이었다. 서예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한국의 고대서예는 중국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또한 자국의 고유한 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단조로운 수용의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한국의 서예사를 살펴보면 중국서예에 한국 고유의 문화와 심미관등이 결합되어 중국서예와 구별되는 한국적 서풍을 형성해온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한편, 기존의 한국 서예연구는 주로 중국서예의 수용이나 연원관계 파악에 관한 주제가 주를 이루어왔다. 그러다보니 아직까지 한국 서예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가 미비한 상황이다. 한국이 중국서예를 수입하였지만 이를 어떻게 토착화시키고, 한국 고유의 서풍을 형성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은 현 한국 서단에 주어진 시대적 과제이다.
고구려의 서예 -야취적 감수성
이러한 연구를 하는데 있어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나라가 고구려다. 고구려는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토착화시켰고 백제와 신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압록강을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넓은 지역을 차지한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온 주몽(朱蒙, 동명성왕)이 세운 나라다. 처음 졸본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차차 압록강 건너에 있는 통구(通溝) 부근으로 국도를 옮기고, 남으로부터 서북으로 한족(漢族)이나 선비족과 대항하여 끊임없는 공세를 이겨냈다. 용맹스럽고 씩씩한 성격으로 일관한 고구려는 우리나라 역대 어느 시기보다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를 전해주는 나라다.
고구려는 모든 면에서 그들만의 진취적이고 건설적인 기질을 드러냈다. 그들의 건축, 회화, 조각등을 보면 늠름하고 견실하며 세찬 힘을 느낄 수 있다. 글씨를 보아도 힘찬 고구려의 기상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광개토왕비>(414)다. <광개토왕비>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이 별세한지 2년 후에 아들 장수왕이 부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훈적비로서 6미터가 넘는 기념비로 이같은 거대한 비는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동시대의 중국에서는 주로 잘 다듬어지고 화려한 비를 세웠는데 반해 이 비는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이민족의 거석기념물의 하나인 선돌(menhir)과 닮았다.
<광개토왕비>는 둥근 점과 직선의 필획만으로 이루어진 글씨로 단순함을 특징으로 한다. 또 이체자(異體字)가 많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이 이체자중에는 중국에서 사용되지 않는 글자들이 있어 문자사용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글자꼴은 마치 남산돌부처, 석장승, 목장승, 분청사기, 민화처럼 해학적이고 의외적인 표현양식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광개토왕비>와 거의 유사한 시기에 제작된 <광개토왕호우>(415), <중원고구려비>(5세기 중반), 평양성각석(6세기 후반) 등의 고구려 글씨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고구려서예의 미의식
이러한 특징은 벽화의 묵서, 벽돌에 새겨진 글씨와 금동불상명문에까지 이어진다. 이들은 모두 즉흥성이 강하고 힘찬 기백이 느껴지며 마치 신들린 무(巫)가 황홀경에 빠져들어 춤을 추는 모습인 듯 신명이 넘친다. 글씨의 조형을 보면 거의 중복이 없는 부정형이며 조금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모양이다. 이와같이 무작위하고 부정형의 형태를 한 글씨는 당시 중국에서도 유사한 예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서체분석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고구려의 서예는 동중정(動中靜)의 감성적인 표정을 하고 있고, 당시 중국의 서예는 정중동(靜中動)의 정리된 표정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다듬어지지 않은 야취적인 감수성과 화려하게 정제된 합리적 이성주의는 양국 서예의 대비적인 특징을 이룬다.
이러한 고구려의 서예에 대해 서로 다른 엇갈린 주장이 공존한다. <광대토왕비>등 고구려의 비문서예가 등장할 당시의 중국서예는 3천년 서예사에서 가장 찬란한 동진(東晉)에 속하며, 서예의 성인(聖人)이라 불리어지는 왕희지의 행초가 온 중국을 풍미하던 시대이다. 왕희지의 글씨는 극도로 세련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따라서 이를 기준으로 고구려의 서예를 바라보면 치졸하고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을 줄 수 도 있다. 이러한 서예사적 배경을 염두에 둔 어느 중국학자는 “고구려가 지리적으로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고 서예를 숭상하는 기풍이 없었으므로 시대적인 서풍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와같이 중국서풍과 비교적인 측면에서 고구려 서예의 후진성을 주장한 학자는 중국 뿐아니라 한국에도 존재한다.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고구려 서예를 매우 높게 평가한 학자도 있다. 청말의 서예이론가 강유위는 고구려의 <평양성각석>(6세기 후반)을 고품하(高品下)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고품은 아주 높은 품계에 속하며, 중국해서의 꽃으로 불리어지는 북위의 <장맹룡비>와 수나라를 대표하는 <용장사비>보다도 높은 등급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고구려 서예의 주장에 대해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가? 미학적 해석은 논리적 해석과 다르므로 항상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엄밀한 의미에서 고구려의 글씨와 동진의 글씨는 우열을 가리는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고구려에서 성행한 글씨인 예서와 해서, 동진에서 성행한 행초는 애초부터 추구하는 형태가 다르다. 그러므로 이 둘은 나란히 놓고 우열을 결정할 수 없는 비등척도성(非等尺度性)에 해당된다.
고구려의 글씨가 장엄함, 고졸함 그리고 야취적인 느낌을 예서와 해서로 표현했다면, 왕희지를 중심으로 한 동진의 글씨는 세련됨과 화려함, 섬세함을 행서와 초서에 표현하려 했다. 그렇다보니 추구하는 서체미의 기준 또한 다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고구려 서예의 미의식을 가지고 당시의 중국서예와 함께 우열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그보다는 고구려 서예의 내재적인 의미를 밝혀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일본학자 유종열은 “자연은 각 국민에게 특수한 토지, 특수한 기후, 특수한 역사, 특수한 풍습을 주고 있다. 거기에서 독자적인 것이 나오지 않는다면 자연의 의지에 어긋난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기물도 국민적 성격이 충분히 나타나야 한다. 국민성의 상실은 한 나라의 미술을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고구려 서예의 독창성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게 함과 동시에 지나치게 중국중심주의에 빠져 한국서예의 실상을 놓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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