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예재료의 추상성 **
추상적 도구로서의 모필
: 진대(晉代)의 최표(崔豹)는 "몽염이 처음으로 붓을 만든 것은 진의 붓일 따름이다.
마른 나무로 관을 만들고 양털을 달았는데 이른바 창호이다. 토끼털에 대나무관이 아니다. : 몽恬始造卽秦筆耳, 以枯木爲管, 羊毫爲被, 所謂蒼毫, 非兎毫竹管也(최표, 고금주, 권3, 혹은 중국고대 서사, 동문선, 1993년판, 174~175페이지)" 라고 하여 최표가 최초로 붓을 만든 것 같이 말하였다. 기원전 221년 진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진시황은 몽염의 그 공을 인정하여 그를 서사(書事)와 관계있는 내사(內史)에 임명하였기 때문에 종이를 만들었다는 채륜과 마찬가지로 몽염도 붓과 무관하지 는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붓을 처음 만들었다는 설은 객관성있는 증거가 없다.(그러나 옛날 중국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사실이 출현하면 그것을 한 사람의 업적으로 돌려 그것의 창시자 라고 하는 경향이있다.예를 들면 앞에서 언급한 종이의 발명자가 채륜이라고 한 것과 같이 문자에 있어서도 사주는 주문, 이사는 소전, 정막은 예서, 사유는 장초, 장지는 금초, 왕차중은 팔분, 유덕승은 행서를 지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수대(隨代)의 우형(牛亨)도 옛날에 서계가 있었던 이래로 당연히 붓이 있었다.
세상에서 몽염이 붓을 만들었다함은 무슨 말인가 : 自古有書契以來, 便應有筆, 世稱夢恬造筆, 何也" 라고 하였다. 사실 붓의 역할 없이는 글로 표현할 수 없음을 생각할 때 서예용구 중에서 먹과 더불어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중의 하나일 것에는 틀림없을 것 이다. 현재 붓의 실물이 발견된 가장 오래된 것은 1954년 중국 장사(長沙)고분에서 발견된 전국시대의 붓이다. 이 붓은 전체의 길이가 21cm이며 필투를 끼면 23.5cm이다. 필관과 필투 모두 대나무로 만들었으며 필투는 토끼털로 전해진다.한편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붓으로는 1988년 경남 의창군 다호리 고분에서 기원전 1 세기경의 삼국시대 생활용품 70여점과 같이 길이 23cm 정도의 칠기 손잡이로 된 붓 다섯자루 가 출토된 것이 그 처음이다.(曺首鉉, 韓國 書藝의 史的 槪觀 - 고대에서 조선 후기까지를 중심으로 -, 南丁 崔正均 敎授 古稀紀念 서예술 논문집, 원광대학교 출판국, 1994년, 141페 이지) 고고학적으로 볼 때 중국 장사에서 출토된 붓은 많은 학자들이 초기시대에 사용되었을 것으 로 추정되는 것보다 상당히 진보된 서사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이전에 대나무나 나무 꼬챙이와 같은 원시적인 서사도구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송인(宋人) 조희곡(趙希鵠)은 "상고시대에는 대꼬챙이에 칠을 찍어 썼다. 문헌 : 格致鏡原 제 37권, 혹은 中國古代書史, 東文選, 1993년판, 178페이지) 라고 하였던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중국 반파 유적지에서 벼루가 발견된 점을 고려할 때 이 때부터 붓이 사용되었을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겠으나(서안의 반파 유적지에서 발굴된 양소문화의 채도문양에는 구조는 간단하 나 홍, 흑, 백, 회색에 의하여 그려진 인면, 야수, 초목이 있다. 이것들의 선은 굵고 가는 변화를 주면서 잘 그려져 있다. 이들은 기원전 약 4000년 경의 것으로 이 때부터 이미 탄력 성 있는 모필을 사용한 것이 아난가 하는 견해도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상 서예에 사용되 었다고 생각되는 최초의 전국시대의 붓은 현재의 붓과는 다른 붓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데 무엇보다 크기가 작은 것이었다. 진시대에서도 작은 붓을 사용하였으므로 큰 문자를 쓸려 고 할때는 같은 획을 몇번이고 그어야 크게할 수 있었으므로 글자의 원형이 맞지 않음은 물 론 시간도 걸리게 되었다. 그러나 시대와 더불어 점차 모질도, 축도 개량되어 오늘날의 붓이 되었을 것이다. 붓의 변화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붓의 크기였다. 큰 붓의 출현은 서체에도 큰 변화를 주게 되었다. 즉 큰 붓의 출현과 더불어 큰 글씨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음은 물론(예 : 개통포사각 석 開通褒斜刻石, 66) 예서의 특색인 파세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잘 알고 있듯이 서예에 사용되는 붓(毛筆)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대롱(붓대)에 짐승의 털을 넣은 것으로, 붓의 성능은 사용하는 털의 종류나 털의 질에 따라 변하게 되므로 다양한 종류의 붓이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붓의 발명이나 개량에 대해서는 여러 각도에서 고찰할 수 있겠지만 서예로서의 붓은 추상적 도구로서의 모필의 발견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서예가 서예로와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추상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붓을 사 용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에서는 근대적 서양문화가 들어오기 전까지의 필기구로는 붓 뿐이었으나 각종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붓은 차츰 시대에 뒤떨어진 필기구로 인식되어 그 사 용이 줄어들게 되었고 오늘날 현재에는 서예를 위한 붓의 사용을 제외하면 거의 전부 만연 필, 연필, 볼펜 등으로 서사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서양문화의 일방적 동양침투 형상으로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 인간이 가장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서양문화 의 발전으로 야기된 인간이 만든 공해 때문이며 앞으로 언젠가 인간이 멸망할 날이 온다면 그것은 인간이 만든 공해 때문일 것이다. 붓은 태양빛을 받아 성장한 식물을 먹고 살아가는 짐승의 털로 만든 것이므로 그 재료의 원천은 태양이 내려준 것으로 붓은 실로 위대한 필기 구인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붓을 많이 만들어도 인간이 만든 오늘날의 필기구와는 달리 공 해를 남기지 않는다. 이렇게 태양으로부터 만들어진 붓은 서사용구로서 인간으로부터 점차 외면 당하고 있으나 그 뛰어난 성능에 의해서예가 서예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날 첨단기술에 의해 만들어지는 볼펜이나 연필이 붓이 만들어진 그 옛날에 만들어졌다 면 서예라는 말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서예는 붓이 어떤 필기구보다 최첨단 필 기구였기 때문에 그 붓의 기능으로부터 서예가 탄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한자루의 붓으 로 획을 굵게도 가늘게도 그을 수 있으며 큰 글씨나 작은 글씨도 조형에 맞도록 쓸 수가 있다. 그리고 사용하는 먹의 종류에 따라서는 여러가지 농도로 글을 쓸 수도 있는가 하면 그림 을 그릴 수도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쓰는 시람의 감정이 붓끝을 통해 예민하게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낼 수도 있다.
또한 오늘날 가장 많이 사용하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첨단 필기구인 볼펜의 경우 글을 쓰기 위한 힘의 대부분이 글의 표현과는 상관없는 외형적 자획의 흔적(凹형)을 남기는데 소모되는 붓의 경우는 아무리 얇은 종이에도 글을 쓸 쑤 있는가 하면 받침이 없더라도 글을 쓸 수가 있다. 이것은 붓에 가한 힘이 거의 전부가 글씨의 내형적 표현 그 차체에 소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을 쓰기 위한 현실적인 힘은 거의 전부가 글씨에 추상적인 힘의 형태로 변하여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기능을 가진 붓이 있었기에 서예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예로서의 붓의 발견 은 곡학적 견지에서 생각하는 서사(書寫)기구로서의 붓의 역할을 하게된 시점이 아니라 평면 공간인 백지위에 감정의 표현, 속도의 표현, 깊이의 표현 등등 여러가지 서예의 예술성 표현 을 가능하게 하였던 추상적 붓의기능 발견 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먹의 추상적 기능 : 한대(漢代)의 위탄(韋誕)이 먹을 만들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나 먹을 언제 누가 만들었는 지는 알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다른 서사재료와는 달리 먹이 역사상 언제 등장햇는지는 그 연대를 밝히기 어렵다. 먹의 제작에 신화적 기원을 부여하고 있는 중국의 사료들은 기원전 2697 ~ 2597년경 전설적인 황제(黃帝)시대에 살았던 천진(天眞)이라는 사람이 발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먹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신화적 해석 때문에 먹의 제작년대를 알기가 더욱 어렵다. 그러나 상고시대 사람들은 대꼬챙이나 나무막대로 칠(漆)을 찍어 간독(簡讀)에 사용했을 것이라는 것은 전항(前項)의 '추상적 붓의 발견'에서 언급한 것과같이 사실일 것이다. 이것은 중국 반파 유적지에서 발굴된 도기 파편에 새겨진 문자형의 채색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먹에 관한 여러가지 고대사가 자세히 기록된 문헌은 많다.(예 : 중국고대서사, 동문선, 1993년판, 178 ~ 185페이지) 그러나 본고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종이, 붓과 마찬가지로 서예 의 예술성을 창조하는 추상적 의미에서의 먹의 발견, 서의 흔적 표시에 사용되는 먹의 추상 적 의미 등에 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글의 표현에는 먹을 사용하여야 한다. 먹을 묻히지 않은 붓으로도 글을 쓸 때 붓으로부터 여러가지 저항감, 즉 일종의 필감을 느낄수는 있으나 아무런 시각적 흔적이 남지 않는다. 서 예가 서예이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종이 그리고 붓과 마찬가지로 먹을 사용하지 않으면 평면예술에 대한 장님과 다름없다. 먹을 사용함으로해서 서예의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사실 먹을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서사(書史)의 역사와 더불어 흑 서의 역사가 존재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4천년경이라는 중국의 반파유적지로부터 '인면어신'의 문양이 적과 흑으로서 그림이 그려진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재질은 분명하지 않으나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연히 갑골문 이전의 시대부터 존재하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때부터 묵서(墨書)를 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며 더욱이 서예로서의 먹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먹은 표현하는 것, 흔적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생각할 때 갑골문이 생겨난 그때부터 먹의 추상적 존재는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각구(刻具)를 사용하여 문자의 흔 적을 나타낸 것은 먹을 사용하여 흔적을 나타내는 것과 다를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예 에서의 먹의 발견은 단순한 문자의 흔적 표시만이 아닌 서자의 정신성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추상적 의미에서의 먹의 발견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당대(唐代)의 서예가 이면서 화가인 장언원(張彦遠)이 먹은 사용법에 따라서 5색(중국에서 많다는 의미로 사용)으로 된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먹은 단순히 검은 것 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먹의 색은 더 없는 흰색부터 더 없는 검정색까지가 모두 흑색인 먹의 색인 것이고 이 사이의 여러가지 검정색이 모두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다. 회화와 달리 서예에서는 색채를 가지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무한한 색감의 표현이 가능한 것이고 각(刻)한 것 이산으 로 깊이를 느낄 수도 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먹의 추상성을 살릴 수 있다.이와 같이 종이에 대한 백지의 공간, 붓에 대한 기능, 그리고 먹에 대한 색감과 입체감 등 의 추상적 개념성립과 더불어 서예는 확고한 예술적 위치를 확립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