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서로 쓴 박지원의 서간(18세기), 24×33.5cm,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行書에 대한 고찰 --------
----------------------------------------------------------------- 1. 서론 현재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서체는 해서와 행서이다. 그중 행서는 간편히 빨리 쓰고 읽기도 편해 널리 쓰여지는 서체이다. 행서는 여러 방면으로 탁월하여 형의 마무름법도 비교적 자유로우며 運筆여하에 따라서는 변화가 풍부한 妙味가 깊은 線修(선수)를 만들기 쉬워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발전성 있는 서체라 하겠다.
2. 행서의 성립
일반적으로 行書라 하면 楷書(해서)를 얼마간 흐트려 놓은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초기 행서의 성립은 隸書의 비능률성과 草書의 난해성을 해결하고자 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행서의 효시는 後漢 桓靈(환령)때의 劉德昇(유덕승)의 것이 정설이다. 그밖에 행서의 명칭이나 유래는 왕의지(王義之)와 함께 書의 명인으로 추대되고 있는 魏(위)의 鐘繇(종요)(151-230)라는 書家가 行神書(행신서)를 잘썼다고 하는데, 행서란 명칭은 바로 이 '행신서'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3. 행서의 역사
1) 漢代 한대는 아직 행서다운 행서는 아니었다. 이 시대는 이른 바 波勢(파세)의 시대로, 당시 유행한 예서는 한점 한획을 일일이 떼지 않고 이어 써가는 행서와는 근본적으로 달랐고 행서다운 면은 보이지 않는다. 2) 삼국시대 이후의 東晉(동진) 위에서 언급한 행신서가 이 시대에 출현하여 행서의 탄생을 알리며 발전하여 書星 왕희지의 시대를 맞이한다. 그는 유명한 喪亂帖(상난첩)을 남겨 행서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 시대의 행서를 보면 右回折(우회절)이 강하게 작용하는데, 그 위에 점과 획의 자율성이 강화되고 필획의 技巧가 발달하여 예리하고 섬세한 것을 보여주어 한글자 마다 마무리가 특별한 것을 보여준다. 또한 波勢와도 완전히 인연을 끊고 三折의 骨法을 기본으로 삼게 된다.
3) 初唐 초당은 古典主義, 즉 왕희지 형태의 서체의 절정기로 毆陽詢(구양순), 諸遂良(제수량), 우세남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서도가이다. 작품으로는 구양순의 史事帖(사사첩)과 우세남의 汝南公主墓誌名(여남공주묘지명), 저수량의 枯樹賦(고수부) 등이 대표적이다.
4) 中唐 저수량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한 古典主義가 안진경의 반고전주의에 의해 격동되는 시대이다. 안진경은 그의 해서의 골법 그대로 행서의 필세도 필획의 겉과 속을 그대로 드러내는 고전주의와는 달리 비튼 듯하는 기법, 즉 中鋒적인 기법으로 붓을 잡아돌려 의지적인 통일력이 전체에 나타나게 하는 완전히 새로운 행서의 표현을 만들어 내고 있다.
5) 末唐 안진경 이후 이렇다할 만한 대가의 탄생을 보지 못한 시대이다. 柳公權의 聖慈帖(성자첩), 정번즉의 最燈張來目錄跋(최등장래목록발), 杜牧(두목)의 張好詩幷序(장호시병서) 등이 유명하다.
6) 宋代 송대에는 蘇軾(소식), 黃庭堅(황정견), 미비라는 걸출한 대가들이 출현한다. 소식(1036 ~1101)은 詩, 詞, 故, 書畵에 모두 능한 천재로 東波道人이라 불리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黃州寒食詩 등이 있다. 또한 송대 최고의 서가로 불리우는 그의 글씨를 보고 筆意를 느껴 폭넓은 공부를 하여 自成一家한 유명한 사람이다. 이 시대는 이러한 대가들을 배출한 것과 더불어 강한 의지, 강한 주관을 표출하는 表出主義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7) 元~淸 이 표출주의의 탄생이후 南宋으로부터 元으로 또 明으로 反古典의 바람은 확산되어 간다. 원의 趙子昻(조자앙)이나 明의 文徵明(문징명) 같은 훌륭한 고전주의 작가가 나타나서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지만, 반고전의 운동은 끊임없이 생겨나 명말에는 浪漫主義의 흥성과 더불어 草書의 기법인 蓮綿勢(연면세)의 도입과 金石學의 행서 필법에의 도입등이 나타난다. 명말의 낭만주의는 해서 필세인 연면세를 행서에까지 도입하여 행서의 신경지, 즉 楷書적 구성을 초월하여 유동감을 가미하게 된다. 이 신경향은 명말부터 청초에 걸쳐 널리 유행하게 된다. 청대에서는 老古學古文書學의 한부분이라 할 수 있는 금석학의 필세에의 도입이 시도된다. 이러한 시도를 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趙之謙(조지겸)으로 古法을 사랑하는 자의 눈에는 '파괴의 무법자'로 보여 많은 배척을 받았다. 원래 북위의 石刻이라면 해서로 극한되는데 그는 여기서 찾아낸 유형을 다시 행서의 형까지 끌어들여 북위의 석각에서 볼 수 있는 뛰어난 지성으로 새로운 행서를 등장시킨다. 조자앙의 출현은 중국적 현대의 출발을 의미한다.
8) 現代 지금 중국은 커다란 회전을 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館閣體(관각체)를 해방하라는 소리가 널리 외쳐지고 있다. 관각체란 관공서의 체, 즉 관료체로서 이것은 곧 전래의 고법을 의미한다. 옛날 魯邊(노변)이란 사람은 중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中華의 사상을 박멸해야 한다고 말한적이 있다. 관각체의 추방운동과 이 사상을 비교해서 본다면 아주 흥미있는 일이다.
4. 행서의 필법
행서는 楷書를 本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그 書法도 해서의 그것과 크게 틀리지 않는다. 書藝의 모든 書體가 저절로 된 것이 없으므로 서법이란 전체를 꿰어 통한다고도 볼 수 있다. 우선, 해서와 행서의 다른점을 살펴보면, 해서는 주로 藏鋒(장봉)으로 쓰지만 행서는 露鋒(노봉)으로 쓴다. 藏鋒(장봉)을 감추어 쓰는 것이다. 그래서 붓끝의 흔적이 날카롭게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露鋒(노봉)은 붓끝을 드러내어 쓰기 때문에 끝이 드러나게 된다. 다음으로, 해서는 붓을 대고, 밀고, 들고해서 한획 한획을 쓰지만 행서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기필(起筆), 행필(行筆), 수필(收筆)이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데 행서는 해서와는 달리 외연적 연결성이 뚜렷하므로 筆順을 잘 알아서 한꺼번에 써 내리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 행서에는 미약한 虛劃이 있다. 해서에서도 갈고리를 할 때 허획이 생기지만 행서보다는 덜하다. 행서에서 연결성은 허획으로 강조되는 경우가 많응데 이 허획을 實劃과 구분하여 쓰지 않으면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되어 좋은 글씨가 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행서를 쓸 때 문제점은 中鋒과 側鋒(편봉이라고도 함)인데 해서는 거의 중봉으로 쓰지만 행서나 초서는 중봉으로만 쓰기에는 묘미가 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런 표현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된다. 초심자는 당연히 중봉을 따라야 하며 스스로 연륜이 쌓였다고 느낄 때 조심스레 편봉에 눈을 돌려야 하리라 본다. 행서를 꿰뚫는 대원칙의 하나가 행서를 쓰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막히는 곳이 있으면, 해서를 찾아보면 쉽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행서의 대표적 작품
1)蘭亭敍(난정서) : 왕희지의 난정서는 행서뿐만 아니라 서예의 대표적 작품의 하나로 晉(진)의 穆帝(목제)때인 永和 9년 (353) 3월 3일, 강남의 문인, 묵객 41명이 會稽山陰(회계산음)의 蘭亭(난정)에 會合하여 契事(계사)를 지내고, 流觴曲水(유상곡수)의 연을 베풀어 시를 지으며 봄날을 즐겼다고 한다. 이때 왕희지는 서빈필로 蠶繭紙(잠견지)에 시의 서문 초고를 썼다고 하는데, 이것이 곧 난정서로 그 자신도 마음에 들어 하였다. 그러나 당 태종은 이것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유언으로 그의 무덤에 같이 묻게 하였으므로 진본은 남아 있지 않고, 후세에 전하여 오는 것은 당시의 능서가들이 임서한 것이며 여러 종류가 있다.
2)集字聖敎序(집자성교서) : 집자성교서는 당의 僧(승)인 현장법사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친히 태종이 서문을 짓고 고종이 그 記(기)를 적어 현장이 번역한 心經과 같이 새긴 것으로 글씨는 흥복사의 승려인 懷仁(회인)이 왕희지의 진적 행서중에서 한자씩 모아 비에 새긴 것이다. 글자수는 무려 1792자나 되며 회인 반생에 걸친 노력의 결정이라고 한다. 청아한 선과 기품이 높은 이 글씨는 난정서와 더불어 행서의 쌍벽을 일컬어 온다. 다만 한자한자 집자한 것이기에 글자사이의 필의가 이어지지 않으나, 왕희지의 행서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3)枯樹賦(고수부) : 고수부는 저수량이 35세때 쓴 것이라고 하는데, 운필에 미묘한 변화가 있고, 탄력이 있으며, 부드러운 느낌이 난다. 그리고 글자가 약간 기울어진 것 같아 보이고, 글줄기가 굽어 있으나 필의가 잘 이어져 있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으며, 전체의 균형이 잡혀 있다.
4)爭坐位帖(쟁좌위첩) : 쟁좌위첩은 草稿(초고)로 쓰여진 것으로 고래 안진경의 삼고중의 하나로서 유명하나, 왕희지의 난정서와 더불어 행서의 쌍벽으로 알려져 있다. 용필에 꾸밈새가 적고, 장봉, 원필로서 선이 비교적 굵고 둥근 맛이 난다. 그리고 운필의 속도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보통의 속도라 할 수 있고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이 서첩에는 행초중에 많은 해법이 섞여 있다. 넓고 소박한 마음으로 대범하게 써 나가면 이 서첩과 서로 호흡이 맞을 것이다.
5)松風閣詩券(송풍각시권) : 황산곡이 58세때(1103) 流謫(유적)의 몸으로써 湖比鄂城縣(호비악성현)의 樊山(번산)에서 쉴 때 이 지역의 토지의 풍경을 사랑하고 산중의 노송사이에 있는 한 누각에 松風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쓴 것이다. 이 시구에'東波道人(동파도인)이 이미 샘물에 잠기고 張候(장후) 언제라도 눈앞에 떠오르네'라고 있는데 이 때에 소동파는 이미 죽고 장후가 오게 되었지만 아직 오지 않는다. 하룻밤 비에 젖어 추워진 계곡을 바라보고 오로지 거듭되는 궁핍한 역경을 벗해 여러 친구와 酒遊(주유)할 수 있을 거라고 비탄한다. 황산곡이 만년, 憂悶(우민)의 생각을 품과 四川地方에 있었던 때의 작품은 기상이 매우 높은 우수성을 지니고 있다.
6)范滂傳(범방전) : 崇年(숭년) 4년(105) 산곡이 의주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정치상의 신구양당의 싸움이 있어, 정권을 취하고 있는 신법당의 세력이 맹위를 떨치고 구법당의 사람들은 탄압을 받고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황산곡도 그 중 한사람으로 만년에는 이와같은 가장 궁벽한 시골로 추방되었다. 거기에서 한 대에 있어서 청절이 높은 일로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인물인 范滂(범방)의 전기를 휘호하는 일을 그 지방관리를 지낸 여씨가 청탁했다. 그때 산곡은 범방전을 암송하여 대서했다. 끝마칠 때는 겨우 2-3자의 오자만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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