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서체/행서

행서감상

時丁 2012. 8. 27. 15:09

 

 

 

 

경봉스님의 글 입니다. 작품이 무척 좋네요. 서체는 행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몇 천년간의 한자(漢字)의 역사를 볼 때 다양한 문자(文字) 형태를 가지고 발전되어 왔지만, 역시 문자가 지닌 기본적인 특징인 효율적 사용을 위해서는 단순한 자형(字形)과 편리한 필기(筆記)의 가치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단순성과 편리성을 함께 지닌 특성을 가지고 일반인이 주로 사용하는 서체가 바로 행서(行書)입니다. 규격체로 인해 비능률적인 해서(楷書)의 단점과 지나친 간략화로 난해한 초서(草書)의 단점을 함께 보완하고자 생겨난 서체가 행서(行書)입니다.)

 

 

지난 번 서울 유마 모임에서 "서예작품의 감상" 이라는 주제가 나왔기 때문에, 제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간략히 글을 올립니다.

 

먼저, 예술 작품에 대해서 논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임을 밝힘니다.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간단한 포인트만을 다루겠습니다.

 

1. 서예 작품은 그림과 달리 누가 썼는가? 라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림은 "그림 자체가 잘 되었는가" 라는 점이 매우 큰 부분을 차지 하지만, 서예 작품은 "누가 썼는가?"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의 서예 작품 중 최고의 가치(경매 시장에서)를 가지는 작품은 한호 한석봉의 글씨가 아닙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인물로 널리 존경받는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로 평가되는) 의사 안중근의 글씨가 가장

높은 가치를 가집니다. 서예 작품 자체로는 그리 빼어난 글씨는 아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도 상당히 높게 평가 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행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에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작품이 낮게 평가될 것 입니다.

같은 이치로, 기독교인과 불교인에게 경봉스님의 글씨의 가치는 완전히 다르게 평가 됩니다.

반면, 그림은 상대적으로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 종교적 성향,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 등 등 에서 비교적 자유롭죠?

 

 

 

2. 현대의 서예와 과거 조선시대의 서예의 내용은 큰 차이를 가집니다.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선생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당시 어른들은 인생을 통해 깨달은 바, 혹은 삶의 기치로 삼고 있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서예가들은 자신의 생각을 작품으로 남기기 보다는 선인들의 글을 바탕으로 서법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스님들의 글은 대체적으로 경전에서 왔거나, 경전을 인용하여 작품을 남깁니다.

일반적으로 스님들은 서예를 작품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의 수행법, 교양의 하나로서 행합니다. 일반적으로 스님들의 글은

일반인과 비교하여 "형식을 갖추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경향이 강합니다. 같은 선생에게 배웠다 하더라도 작품의 성향이

많이 다르며, 대체적으로 결과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부드럽게 나온다 합니다.

 

 

 

3. 균형, 비율, 강약---음악과 비교하여.

흰 색 바탕 위에 검은 먹을 사용하여 글씨를 쓸 때, 가장 기본적으로 똑바로 썼는가? 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노래를 부를 때 정확한 음정을 내지 못하면 음치라고 하죠? 글도 똑바로 쓰지 못했다면 좋은 글이 아닙니다. 흔히 바이브레이션 이라고

하는 기교를 생각해 봅시다. 기본 음은 충실히 지키면서 기교를 부리며 "음의 떨림"을 줄 때에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처럼,

글씨도 기본적으로 "심과 골격이" 단단하게 "정확한 음"을 내는 가운데에서 기교를 부려야 합니다.

균형과 구도- 눈으로 보기에 흔히 "황금비율" 이라는 균형감을 갖추어야 합니다. 글과 글 사이의 여백, 글 내에서 획 사이의 여백,

획의 굵기의 균형, 양옆, 위 아래의 여백 등 등 비율적으로 안정감, 무게중심을 갖추면서 편안한 느낌을 주어야 합니다.

 

 

 

4. 먹의 농담 조절. 먹의 양 조절에서의 균형

서양 붓과 서예붓의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의 그림은 여러 번 덧칠을 하며 완성도를 높여 가지만, 서예는 단 한번의 획을 긋는 동안

붓의 가장 뾰족한 부분이 획의 가운데 골격을 지나가며 단 한번에 글에 뼈대를 아름답게 완성해야 합니다.

자세히 보면 먹이 많이 먹은 부분, 마른 느낌으로 거칠게 그은 획이 있습니다. 서예 작품 내에 먹이 많고 적음이 다 갖추어 지면서

강, 약을 조화로이 형성해야 합니다. 모두 먹이 많이 먹어도 안되고, 마른 붓으로만 완성되어도 안되겠죠?

획 하나 하나 에서도 먹의 농담이 다르고, 글씨 하나 하나에서도 먹의 농담이 다르 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강약이 형성됩니다. 음악의 강약이 적절하게 배합되어야 아름다운 것 처럼, 서예 작품도 먹의 조절로 강약을 두루 갖추어야 합니다.

 

 

5. 가독성

아무리 글씨가 좋아도 내용을 읽지 못하면 소용이 없을 것이고,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글씨가 나쁘면 좋은 서예 작품이 아니죠.

그림과 비교하여 이 부분에서 크게 차이가 나죠.

 

 

 

6. 글씨 자체의 이미지를 논하는 것이 가능한가??

간단히 말해 소나무 송 "松" 자를 쓸 때 거친 소나무를 생각하며 거칠게 쓰거나, 부드럽고 예쁜 소나무를 생각하며 부드럽게 쓰는 경우가

있는가? 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능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사실은 절대 지양해야 하는 자세로서, 그런 해석을 해서는

안됩니다. 서예 문단에서 가끔 글자의 이미지를 논하는 사람이 있지만, 정설로서 받아들여 지지 않고 있으며, "이단"으로 분류

된다고 하네요.

 

 

어떤 것이 좋은 작품인가를 따지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 입니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것 처럼 말이죠.

클래식 음악을 듣고 "왜 좋은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수 많은 노력과 세월이 흐른 뒤에 깨달 을 수 있는 것이고,

박자, 음의 흐름이 무작위로 바뀌는 재즈음악을 들을 때 "좋다 나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를 해야 하는 것 처럼요.

 

서예 작품도 많은 작품을 듣고, 오래 동안 배운 후에야 보는 눈이 생기겠죠??

 

선생님이 없이 혼자서 오랜 시간 동안 글을 쓴다고 해서, 열심히 수행을 한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나오기는 힘들 것 입니다.

음악의 신동인 모짜르트도 끝없는 훈련을 통해서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 처럼요.